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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Aug 29. 2024

가족과 편안하세요?

부모의 부부싸움을 보고 자란 아이는 명절이 싫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효자 효녀에 형제간에 우애도 참 돈독해 보인다. 

나는 내 부모 형제와 함께 있을 때 불편하다. 불편을 느끼는 나 자신이 더 불편하고 때로는 불쾌하기까지 하다. 누구보다 편하고 좋아야 할 가족인데 왜 나만 이렇게 마음이 배배 꼬여서 가족을 편하게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남들에게는 너그럽기 그지없는 사람이고 세상 둥글게 살아가는 내가, 왜 가족에게만 이리도 모나게 구는지 내가 싫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추석 때 친정에 가서 하루 자고 와야 한다.

명절이면 열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에 가서 머무는 하루가 나에게는 너무 길다. 당일치기가 불가능한 거리라 어쩔 수 없이 자고 온다. 혼자였으면 기차 타고 갔다가  밥 한 끼만 같이 먹고 다시 기차 타고 집에 오고 싶다. 나도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고 도리도 알고 부모님 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매몰차게는 못한다. 마음으로 우러나는 도리가 아니라 오직 이성과 지식으로 하는 도리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너무나 많이 보고 자랐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치열한  부부싸움 속에서도 나에게 해 줄 것들은 빠짐없이 해 주셨다. 사실 나는 가정환경에 비해 넘치게 사랑받고 배웠다. 엄마는 일을 하시면서도 항상 갓 지은 따뜻한 밥을 아침에 해 주셨다. 내가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응원해 주셨다. 내가 사랑과 응원 속에 자라서 사회 속에서 멀쩡한 사람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친정에 가기 싫은 내가 너무 나쁜 년 같다.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아이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남긴다.

아이는 늘 불안하다. 언제 옆에서 시한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두려움에, 예민해지거나 무기력해진다.  부모님이 같이 있을 때는 그 두려움이 배가 된다. 혼자 있는 게 편하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스트레스 상태에 빠진다. 가장 편안하고 안전해야 할 집이 언제나 폭풍전야 같은데 그 집이 좋을 리 없다. 부모님이 함께 있을 때 편했던 적은 내가 기억하는 한 없다. 부모님이 사이가 좋고 웃고 있을 때조차도 어린 내 눈에는 그것이 신기루처럼 보였다.



추석이 이제 한 달 도 남지 않았다.

나는 이제 부모님의 싸움에 벌벌 떠는 아이가 아니다. 부모님도 이제 늙고 힘이 없어 옛날처럼 격렬한 싸움도 못하신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친정이 불안하고 불편하다. 안 갈 수 있다면 안 가고 싶고, 빨리 집에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끊임없이 계산한다.



아이에게 싸우는 모습을 자꾸 보여주면 나처럼 된다.

친정 부모를 떠올릴 때마다 스트레스로 가슴이 조여 오는 기분을 느끼고, 그 기분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남들한테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무거운 마음으로 살게 된다. 부모님의 부부싸움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결혼하기 전에 다짐한 것이 있다.  결혼해서 우리 부모님처럼 싸워야만 한다면 나는 그냥 이혼하리라. 아이 앞에서 매일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이혼하는 것이 아이의 정신 건강에 훨씬 좋을 것 같다. (이혼 가정은 또 나름의 어렴움이 있겠지만....  사는 건 이래저래 참 힘들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이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라는 것을 중학교 때부터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부모님이 제발 이혼하기를, 그래서 싸우는 모습을 안 봐도 되기를 바랐다. 남보다 풍족하게 못 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더 가난해져서 길거리에 나앉게 돼도 부모님이 싸우지만 않는다면 나는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의 친정 부모님은 별로 싸우지 않으셨다고 한다. 내 기억에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사이가 좋으셨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상당히 점잖고 따뜻했던 분이셨다. 그래서 엄마는 부모의 부부싸움이 아이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는지 모르는 것 같다. 알고는 그렇게 못 할 일이다. 친정아버지는 유복자로 태어나 부모의 부부싸움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역시나 나의 고통을 모른다.



부모님이 그렇게 싸운 상황과 심정을 이해는 한다.(그 이해의 과정은 길어서 다음에 써야겠다.)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해도 친정이 편해지진 않는다. 이해할수록 부모님이 안타깝고 내가 더 싫어지는 기분을 누군가는 이해할 수 있을까? 중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원망한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부모의 상황에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우울증에 걸리지도 않고, 성격파탄자가 되지도 않고 살고 있다. 멀쩡하게 살고 있는 건 부모가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힘이 작용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불편한 마음을 안고도 '도리'라는 걸 하기 위해 명절이면 친정에 가는 것이다. 이번 추석도 제발 무사히, 덜 상처받으며 지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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