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면 손빨래를

낭만이라 생각하면 낭만이지 뭐

by 나로



간밤에 '또' 눈이 내렸다. 올해는 유난히 눈이 더 자주 오는 것 같다. 집에서 창밖으로 휘날리는 눈을 보는 것은 외국 여행이라도 온 듯 낯선 황홀함을 선물한다. 하지만,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수험생 아이와 긴 시간 운전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황홀함보다는 가족 걱정이 앞서는지, 나에게 눈은 '또' 와 버린 불청객이다. 또 하나의 걱정은 빨래다.



눈도 눈이지만, 날씨까지 추워 눈이 온 길이 빙판길이 되게 생겼다.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거실 스피커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세탁기를 돌리면 아래층 세대 배수관이 역류한다는 방송이 나온다. 부산이나 남쪽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아파트에서 이런 방송이 나온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것이다. 나도 처음에 이사 와서 처음으로 세탁기를 돌리지 말라는 방송을 들었을 때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세탁기가 얼어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도 날씨가 추워서 세탁기가 얼었다는 생각을 못했다. 오래된 세탁기가 드디어 말썽을 부리는구나, 이제 바꿀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 날씨가 추운 것과 세탁기를 돌릴 수 없다는 등식은 오랫동안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았던 나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나는 곧 알게 됐다. 겨울 손빨래는 경기 북부 구축에 사는 사람들의 겨울 일상이라는 것을.



흘러넘치는 빨래를 마냥 보고만 있을 수만은 없다. 일기 예보를 보니 앞으로 일주일은 낮기온도 영하다. 그렇다고 빨래를 싸들고 빨래방까지 가는 것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아무거나 함께 썼던 세탁기를 공유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급한 대로 조금씩이라도 손빨래를 해서 세탁기로 탈수만 한다. 건조기가 있으니 빨래를 말리는 것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생업으로 바빴던 친정 엄마도 멀쩡한 세탁기를 두고 수시로 손빨래를 했으니 나도 못 할 일은 아니다. 세재에 담가 놨다가 조물조물해서 대충 헹구면 된다. 말이라도 이렇게 쉽게 뱉어놔야 손빨래가 조금이라도 덜 귀찮다. 문명의 이기에 젖을 대로 젖어 걸레 하나 빨지 않는 내가 손빨래를 해야만 한다. 어쩔 수 없다. 씻고 닦을 수건이 없기 때문에 오늘은 기필코 손빨래를 해야만 한다.



수북한 빨래더미를 뒤로 하고 하얗게 쌓인 눈을 보며 커피 한잔 마시는 사치를 잠시 누려본다.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는 곳에서 매일 세탁기를 돌릴 수 있는 곳, 하나도 부럽지 않다고 체면을 걸어본다. 나는 북쪽 지방의 살을 에는 추위와, 그래서 더 따뜻한 커피와, 겨울이면 한가득 쌓이는 눈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비록 눈보다 더 쌓이는 빨래가 주는 수고는 있지만 세상사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건 당연한 이치다. 나는 기꺼이 겨울의 낭만과 세탁기를 바꾼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천국의 계단 끝에는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