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 공기는 늘 조금 과하다.
형광등은 사람을 납작하게 만들고, 의자 바퀴 소리는 공연히 불안하다. 누군가 웃으면 그 웃음은 유난히 크게 튄다. 그래서 회의에서 내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나는 늘 업무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숫자, 일정, 리스크. 늘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가끔은 업무 대신 말이 온다.
정확히는, 사람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말.
나는 직장인이지만, 동시에 상처를 문장으로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 회사에서는 버티고, 집에 와서는 그날의 일을 글로 옮긴다. 어쩌면 그래서 남들보다 말에 더 오래 다친다. 대신, 그 상처를 끝내 내 것으로만 남겨두지는 않으려 한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익숙한 자리에서 조금 비켜난 뒤, 다른 업무에 다시 적응하고 있었다. 적응이라는 말은 늘 고상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낯선 문법을 다시 배우는 일에 가깝다. 이미 오래 그 일을 해온 사람은 훨씬 빠르고 능숙했다. 회의 중에 그 비교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같은 효율이 나면, 당연히 급여 적게 주는 사람을 쓰지.”
“그러니까 더 분발해야지.”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나는 그 짧은 침묵이 제일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물을 마시고, 누군가는 화면을 보고, 누군가는 못 들은 척한다. 다들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한 발 물러난다. 그리고 그 빈자리 한가운데에, 모욕당한 사람만 남는다.
공개석상에서의 모멸은 늘 이상하다.
무슨 말이 맞고 틀리고를 따질 시간도 없이, 이미 구도가 먼저 완성된다.
너는 여기서 비교의 대상이다.
너는 여기서 안전하지 않다.
너는 여기서 동료가 아니라 평가를 위한 표본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그 다음에 따라오는 말이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이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대개 면책이다.
내 의도는 좋았다고, 그러니 네가 다쳤다면 그건 네가 예민해서라고 말하는 방식. 직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상처가 자주 불법이 된다. 누군가는 사람을 찌르고도 선의를 주장하고, 상처받은 사람만 민감한 사람이 된다.
예전의 나는 이런 순간마다 스스로를 설득했다.
프로니까 참아야지.
회사니까 버텨야지.
혹시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나를 함부로 규정하는 말은, 내 가치의 설명이 아니라 상대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 사실은 조금 차갑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숨이 쉬어진다. 상대의 방식까지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니까. 바꿀 수 없는 것 앞에서 덜 흔들리게 해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문제는 감정이 늘 늦게 도착한다는 점이다.
그 순간엔 버틴다. 회의실에서는 얼굴을 관리하고, 목소리를 고르고,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앉아 있는다. 그런데 문을 닫고 나오면 그때부터 말들이 뒤늦게 살아난다. 같은 효율이면. 급여가 아깝다. 분발해라. 그런 문장들이 내 안에서 반복된다. 마치 누가 내 이마에 가격표를 붙인 것처럼.
그날 나는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하면 회의실은 더 소란스러워진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누군가의 말이 칼이 되면, 또 누군가는 그 칼을 구경하고 싶어한다. 나는 그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얼굴이 굳는 걸 느끼면서도, 짧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 말은 동의가 아니었다. 인정도 아니었다.
그저 종료였다.
지금 여기서 내 감정을 더 잃지 않기 위해 선택한 최소한의 끝맺음. 논쟁으로 가지도 않고, 폭발로 가지도 않고, 이 대화가 내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는 말.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머릿속에 이런 문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이건 글감이 되겠구나.
상처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상처가 그날의 판결문이 아니라, 내가 다룰 수 있는 재료로 바뀌는 느낌이었다. 삶이 나를 때릴 때, 나는 그걸 문장으로 바꾸어 되돌려줄 수 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이상하게도 이런 순간에 더 선명해진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 하루를 기록할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집에 돌아와서 나는 일기를 썼다.
멋있게 쓰지 않았다. 교훈도 만들지 않았다. 그냥 사실과 감정을 적었다.
오늘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비교당했다.
돈 이야기로 사람을 재단하는 말을 들었다.
모멸감이 올라왔다.
나는 다치지 않은 척했지만, 실제로는 꽤 아팠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나와 남을 동시에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내게 일기의 역할은 깨달음이 아니다. 격리다.
말이 마음 전체로 번지기 전에, 종이 위 한 칸으로 옮겨 심는 일. 입에서 튀어나온 문장은 칼이지만, 글로 옮겨진 문장은 사건이 된다. 사건은 다룰 수 있다. 바라볼 수 있고, 해석할 수 있고, 필요하면 끝내 넘어설 수도 있다.
그다음에 하는 일은 진실과 거짓을 나누는 것이다.
정말 내가 그 말 그대로의 사람인가.
정말 공정한 기준 아래 비교된 것인가.
효율이라는 말 안에 업무의 복잡도와 책임, 적응의 시간, 조율의 비용까지 들어 있었나.
그 기준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었나.
이 질문들을 붙들고 있으면 대개 결론은 단순해진다.
그 말은 정확한 평가라기보다 지배의 언어에 가깝다.
사람을 숫자로만 환원하면 침묵시키기 쉽다. 경제 논리처럼 들리기 때문에 더 그렇다. 반박하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조용히 있으면 인정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 말의 모양이 논리적이라고 해서, 그 목적까지 정당한 것은 아니다. 때로 직장에서 가장 번듯한 문장이 가장 교묘한 폭력이 된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끝에서 다시 내 쪽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오늘 나는 무엇을 지켰는가.
오늘 나는 무엇을 잃지 않았는가.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된다. 그날 내가 겨우 찾아낸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공개적인 모욕 앞에서 아무에게나 상처를 되돌려주지 않은 것.
그 말을 내 인격의 판결문으로 채택하지 않으려고 버틴 것.
회의실의 분위기와 내 가치를 같은 것으로 착각하지 않은 것.
그리고 끝내 기록해서, 적어도 내 편 한 명은 되어준 것.
나는 이제 안다.
상처는 대개 두 번 온다.
한 번은 상대의 입에서 오고,
다음 한 번은 그 말을 내가 믿어버릴 때 온다.
첫 번째는 막기 어려워도, 두 번째는 막아볼 수 있다.
이건 작가가 악플을 견디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예의 없는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의 마음은 내 권한 밖이다. 하지만 그 문장이 내 자존감의 문장으로 채택되는 것까지 허락할 필요는 없다. 악플을 이긴다는 건 악플이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그 악플이 내 소개글이 되지 못하게 하는 일에 가깝다.
직장도 비슷하다.
회사에는 생각보다 많은 말들이 떠다닌다. 비교하는 말, 줄 세우는 말, 사람을 비용처럼 계산하는 말, 그리고 상처를 주고도 “다 잘되라고 하는 말”이었다고 정리해버리는 말들. 그런 말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흔들린 뒤에 어디로 돌아올지를 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딱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상대가 당신을 어떤 색으로 분류하든,
그 분류표를 당신의 신분증으로 만들지는 말 것.
그들은 당신을 규정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 규정에 서명할 필요는 없다.
회의실을 나오고 나서부터가 중요하다.
그때부터는 당신이 다시 당신의 편이 되어야 한다.
일기로 감정을 격리하고, 사실과 해석을 나누고, 가능하다면 그날의 강점을 찾아야 한다. 오늘의 결말을 상대에게 넘기지 말고, 직접 써야 한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한다.
표정이 굳은 채로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집에 와서 기록하고,
그 기록을 끝내 한 편의 글로 바꾼다.
상처는 나를 규정하지 못한다.
대신 상처는, 내가 끝내 써낼 문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