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워도 한식에 대한 사랑은 포기 못해
슬슬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캐리어만큼만 짐을 챙기기로 했다. 캐리어의 상세페이지를 들여다봐도 도무지 사이즈가 가늠이 안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대략 24인치 캐리어 크기가 A4용지 4장을 합친 정도라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캐리어 크기보다 중요한 건 내가 감당할 수 있을만한 무게인 지였을 텐데 말이다.
오스프리 아우라 40L 배낭과 캐리어 24인치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캐리어로 갈아탄 이유는 단순하다. 매장에서 40L 배낭을 메는 순간 여행 내내 내 소중한 어깨가 남아나질 않겠구나를 절실히 느껴버렸기 때문이다.
이 캐리어에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수화물을 기다리는데, 캐리어가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자 혹시나 엉뚱한 나라로 날아가버린 건 아닐까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쯤 느지막이 레일 위로 덜덜거리며 위태하게 나오는 거다. 뭔가 이상해 보였지만(멀리서 봐도 캐리어 상태는 정상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캐리어 레인커버가 확실하게 나의 소유임을 주장하고 있어 부정조차 할 수 없었다. 러시아 도착하자마자 첫날부터 액땜 제대로 했다지. 어째서 한국인 입국 금지를 피해서 러시아에 무사히 도착만 할 수 있다면 내 캐리어 바퀴 따위의 안전도 당연히 보장될 거라 생각했을까? 이런 곳이 바로 러시아구나.
나의 도전을 멀리서 응원하는 언니의 선물 불닭소스. 이 화끈한 불닭소스만 있으면 러시아 어디서든 한식 부럽지 않을 거라고. 언니 말이 맞아. 하지만 불닭소스 먹은 다음날 아침이 조금 걱정되긴 하더라구
라오스 여행하다 친해진 언니의 세심한 센스. 여행 내내 아프지 말라며 (아마 코로나로부터 면역력을 키우라는 깊은 뜻이 아니었을까) 영양제까지 챙겨주는 마음에 괜히 코끝이 찡해져 온다. 러시아에서 내가 절대로 아프면 안 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덕분에 나는 러시아 여행 내내 코로나의 ㅋ (한글 자모 ‘키읔’)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때 영양제 따위를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코로나에서 나를 책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모습에 이제서야 살짝 어질 해져 오는 건 왜일까. 나 정말 운이 좋았구나.
24인치 캐리어 안에 러시아의 겨울을 넘어선 몰타 여름 수영복까지 챙겨야 하기 때문에 나의 사랑 한식들을 잔뜩 쟁여갈 수 없는 상황이다. 아쉽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만큼만 담느라 혼났다. 고심 끝에 매콤한 깻잎과 약간의 김치볶음, 쇠고기 볶음 고추장을 골랐다. 이래서야 러시아는 무슨 몰타, 영국까지 무사히 다녀올 수 있겠냐는듯한 걱정 어린 한숨에 무슨 일이람. 벌써부터 한식이 그리워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걸.
자물쇠, 바느질 세트, 옷핀, 스프링 고리 등 이것저것 담다 보니 어느새 다이소에서 만수르 놀이를 하고 있는 나. 주섬주섬 담다 보니 아무리 다이소라도 견적이 꽤 나왔다. 자세히 보면 이걸 왜..? 할만한 것들도 있다. 아침만 되면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는 나에게 필수품인 쌍꺼풀 테이프와 (부어오른 눈두덩이 살에 속쌍꺼풀 마저 파묻혀 사라져 버릴 때가 종종 있다) 혀의 건강을 위한 혀클리너까지. 평소 보부상마냥 짐보따리를 한가득 들고 다니던 습관은 장기 여행자에겐 취약점이겠구나. 하긴 떠도는 여행자라고 하나같이 모두 미니멀하진 않겠지. 간혹 나같은 맥시멀한 여행자도 있을거야.
가방에 태극기와 네임텍을 붙였다. 붙였다 떼어낼 수 있어서 아주 만족스럽다. 한편으로 러시아에서는 태극기를 떼어내야 하나 고민하는 이유는 혹여 코로나 때문에 동양인인 나를 해코지할까 봐 벌써부터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하필 출국 시기에 한국에서 신천지 코로나 집단감염이라니. 떠날 날짜가 점점 코 앞으로 다가오니 모든 코로나 관련 뉴스소식에 날카롭게 반응하게 된다.
내 아이폰XS에는 광렌즈 기능이 없다. 그래서 러시아에서의 모든 광경을 눈으로도 담고, 사진으로도 열심히 담아야 하기 때문에 온라인 면세점에서 써패스아이 광렌즈를 미리 구매했다. 카메라 정중앙에 잘 맞춰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눈이 내리는 러시아의 겨울 날씨 때문에 수시로 렌즈를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줘야 했지만 매우 유용하게 잘 사용했다. 지금에서야 출시되는 모든 아이폰 카메라는 광렌즈 촬영 기능이 있지만, 이때 당시에는 이렇게 집게 형식으로 된 광각렌즈를 착용하지 않으면 화각이 매우 좁았다. 휴대하기엔 번거로웠어도 써패스아이 없이는 러시아의 넓은 풍경을 담아내기 어려움을 잘 알기에 매일 열심히 챙겼다.
대한민국의 표준전압은 220V, 러시아 또한 220V의 콘센트를 사용한다. 하지만 몰타와 영국은 230V로 내가 전압변경용 멀티어댑터가 필요한 이유다. 간혹 플러그 모양만 바꿔주고 변압 기능은 없는 어댑터를 사용 시 전자기기에 과부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일부러 전압변경까지 되는 멀티어댑터를 준비했다.
엄마가 꾹꾹 눌러서 만든 누룽지까지.
앞으로 러시아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재료들로(평소 잘하지도 않았지만) 요리를 하며 새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겠지.
완벽하다.
이제 떠날 일만 남았다.
러시아 여행을 준비하며 기록한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