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쫄면이 뭐라고

by 김효주

2월 중순부터 3개월을 내리 달렸다. 번아웃이 왔는지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꽤 총기가 있는 편이고 ㅋㅋㅋㅋ 눈에 힘이 있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데.. 최근 3주간 눈을 제대로 뜨고 다닌 적이 없다. 하...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지금의 스케줄이 너무 부담이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약간 극에 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목 아래 빗장뼈까지 뭔가 차올라 아픈 느낌이 들었다. 이건 억울할 때 느껴지던 감각이자 직장에서 스트레스받을 때 자주 찾아왔던 느낌이다. 심하게 감기에 걸려 열이 오르거나 콧물, 코막힘, 재채기 이런 것이 있다면 감기에 걸렸나 보다 할 텐데... 딱히 큰 증상이 없이 자꾸 몸이 쳐지고 배 아래에서 부터 목까지 뭔가 차올라 넘치려는 기분. 이걸 번아웃이라고 부르면 딱 좋을 거다. 혹시나 해서 몸살감기약 한 알 털어 넣으면 슬며시 졸리면서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깨 보면 통증이 가라앉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케줄이란 녀석은 나의 상태를 기다려주거나 자기가 알아서 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힘든 중에도 일정을 꼭 지켜내고 싶은 열정(?)은 ㅋㅋㅋ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정말 힘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오랜만에 배민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매콤하고 새콤한 쫄면이 먹고 싶어 검색했더니 김밥 전문점을 소개해줬다. 크레미가 들어있다고 해서 ‘ㅇㅅㅂ’라는 글씨를 대충 읽고 김밥도 한 줄 시키고 쫄면도 같이 주문했다. 기다리는 시간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한다. 맘과 몸이 피곤할 땐 집에 있는 어떤 반찬도 맘에 들지 않기에 남이 해서 가져다준 음식을 기다리는 건 즐겁다. ㅋㅋㅋ


드디어 도착한 음식! 하던 일이 있어 잠시 식탁 위에 모셔두고 하던 집안일을 마친다. 넷플릭스에 접속해 아무 생각 없이 단순히 즐겁기 위해 보는 인생만화 no.2를 재생하고 배달된 음식봉지를 가져와 세팅한다. 김밥 한 줄, 쫄면 한 사발! 이제 내 입 속으로 들어와 나를 즐겁게 해 줄 녀석들의 얼굴을 보니 드디어 입에 미소가 그려진다. 쫄면 그릇이 좁아 큰 걸로 바꿔 열심히 비볐다. 하던 일 하느라 몇 분 뒀더니 한 덩이리가 되어버렸나 싶어 아차 싶었지만 열심히 비벼주니 금세 발그레레해졌다. 흐흣 드디어 첫 한 젓가락이 내 입으로 들어오는 순간! 시고 매운 양념장과 쫄깃한 면발이 새싹 채소와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룬다. 걱정, 근심은 날아가고 오로지 입 안의 감각에만 집중하는 시간! 와! 이건 천국이다! 하하하하하 이번엔 코팅된 노란 종이에 앉아있는 김밥 끄트머리를 젓가락으로 쓱 분리해 입에 넣어본다. 듬뿍 넣은 야채가 입에 다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색깔이 보인다. 이거 뭐지? 상아색? 녹두색? 뭐지? 일단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아주 맛난데... 예상치 못한 감각이 입천장에서 코 위로 알싸하게 올라온다. 응? 와사비? 내가 와사비를 넣은 음식을 시킨 적이 있나? 김밥이야, 쫄면이야? 뭐지?


폰 잠금을 해제하고 앱을 열어 주문내역을 확인해 보니... 아뿔싸 ‘와사비크래미김밥’을 주문... 했더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너무 맛있다! 쫄면과도 너무 잘 어울리는 와사비맛! 오늘처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몸까지 아픈 날에 조금 맵고 자극적인 것도 괜찮지. 하하하 TV에는 사랑하는 캐릭터들이 소리를 지르며 배구를 하고 입 안에는 와사비와 매콤한 양념장이 춤을 추고! 눈, 귀, 코, 입까지 행복하기가 이렇게 쉽다니!!!


한참 즐거워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치고 들어온

와사비 공격!


와사비가.....김밥 한 도막에 몰려있... 었나 보다! 목, 코에서 올라온 아릿함이 머리끝까지 찌릿찌릿! 와! 이거 완전 롤러코스터 탄 느낌인데? 거의 새로 태어난 듯! ㅋㅋㅋㅋㅋ 갑작스럽게 닥친 와사비 쓰나미에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버렸다. 목 아래에 신경쓰이던 에이는 감각이 사라진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와우!


김밥, 쫄면.

어느 분식집이든 가서 먹을 수 있는 단골메뉴. 특별히 음식 못하는 집 아니면 다 맛있는 국민대표 분식일 거다. 그게 뭐라고. 오늘 이렇게까지 행복해져도 되는 걸까? ㅋㅋㅋ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말했다. ‘굉장히 싼 스트레스 해소법을 가지고 계시네요!’ 첨엔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했다. 빈정거리는 건지 부러워하는 건지. 그 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관찰해 보니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못 푸는 사람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먹는 게 몸에 부담이 되어 더 아프게 되는 사람도 있고, 먹는 것 자체에 기쁨을 크게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먹는 것 말고 다른 방법, 즉 비싼 방법을 동원해야 해소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정으로 심신이 지쳐 축 늘어지는데 그래도 다음 일정을 소화하려면 가끔 리셋이 필요하다. 시간이 없다면 완전하게 리셋을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지금 느끼는 부담감과 압박감을 털어내 줄 정도면 충분하다. 와사비 김밥과 쫄면이 오늘 그 방법이었다. 2개월 간 쓸데없는 잔소리로 나의 의지를 갉아먹은 강사와 드디어 헤어지는 날! 그걸 축하하는 기념으로, 점심 차리기 싫은 마음을 담뿍 담아 주문한 김밥과 쫄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몸도 맘도 든든해지니 오후 일정을 소화할 의지가 새록새록 일어났다.


뭐든 아주 잠깐 나를 쉬게 하고 리프레시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일 것이다. 잠시 낮잠을 자든, 공원길을 산책하든, 동네에 나가 길고양이들을 관찰하든, 편의점에 가서 젤리를 한 봉지 사 오든. 아니면 좋아하고 믿을만한 사람과 잠깐 안부전화를 나누든.


스스로를 위해 내어 준 시간과 방법은 그동안 챙기지 못한 나와의 관계를 해소시켜 주어 남은 시간을 살아갈 힘을 다시 공급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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