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과 채움을 배우다

꼬마 스테이플러에게서

by 김효주

어라? 왜 안 되지?



서류가 2장이 넘어갈 때 한 장도 잃어버리기 싫어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몇 가지 아이템이 있다. 클립이나 집게도 있지만 선호하는 건 역시 '스테이플러'이다. 부피가 작아서 좋고 종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아 잃어버릴 염려가 없어서 좋다.


논문계획서를 수정하려고 보니 아무래도 연구계획서 자체가 필요할 것 같아서 인쇄를 했다. 한 편에 두 페이지씩 프린트했기에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종류가 여러 가지라 각각 따로 철하면 좋을 것 같았다. 연필꽂이에 들어갈 정도록 간단하게 생긴 꼬마 스테이플러를 꺼냈다. 진홍색 누름덮개를 모자처럼 쓴 은색 친구다. 당연히 될 것이라 믿고 서류를 가지런히 모아 꾹 눌렀는데 평소 같은 소리가 나지 않고 둔탁하게 닿다 떨어지는 촉감만 남았다.


아.. 그제야 문득 든 생각. 철침이 다 됐군! 몇 주전에 마지막으로 충전해 넣은 기억이 났던 거다. 누르면 딸깍하면서 나와서 몇 장의 종이를 꽉 집어주던 녀석이 제 기능을 못하니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단어 두 개가 떠올랐다.


휴식과 채움.


꼬마 녀석은 그동안 휴식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지금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에너지를 공급받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스테이플러의 철침은 딱 그 개수만큼만 일할 수 있다. 더 많이 묶어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스테이플러와 철침의 규격만큼의 일을 할 수 있다. 오늘 내가 사용한 꼬마 녀석은 20장의 종이를 집는 것도 굉장히 힘들어한다. 그렇지만 서랍에 든 더 큰 녀석은 침도 길고 크기에 50장이 넘어도 거뜬히 꽉 잡아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나는 스스로가 얼마나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지 가늠하지 않으려 했다. 하려고 하면 뭐든 될 줄 알았다. 일을 했다면 휴식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새로운 힘을 준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빈 스테이플러처럼 되지 않을 일을 억지로 했던 것이다.



빈 스테이플러에게는 새로운 철침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오래 더 잘 일하기 위해 먼저 휴식이 있어야 한다. 꼬마 스테이플러는 (나에게 고하지 않았지만) 외부 일로 바빴던 나로 인해 몇 주를 푹 쉬었고 오늘 드디어 채움을 얻었다. 그리고 딸깍 소리를 내며 서류들을 예쁘게 묶어주었다.


3학기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지만, 학기 내내 달리던 흐름을 끊지 못한 채 여전히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다. 마음은 쉬고 싶은데 몸은 일단 움직이고 있고, 생각은 잠시 멈추고 싶은데 일상은 멈춰주지 않는다. 이번 방학에는 정말 의도적으로 ‘찐한 쉼’을 계획해야 할 것 같다.


며칠 후엔

또 채워서 달리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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