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염으로 사랑받은 날

by 김효주

최근 7~8년 동안 비염이 거의 없었다. 코가 맹할 때 있어도 괜찮으려니 했다. 그런데 3월부터 봄바람이 불면서 갑자기 비염이 시작되었다. 첨에는 황당해서 금방 낫겠지 하면서 뒀는데 벌써 2달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증상은 이렇다. 코 안의 한 점이 쒜~하면서 찡~해지고 '아.. 이거 위험한데..' 느낌이 오는 순간 재채기가 시작되어 몇 차례 반복된다. 콧물이 비강 안에 가득 찬다. 이 상태로 두면 재채기가 멈추지 않으므로 얼른 코를 풀어 비강을 비워야 한다. 알레르기성 비염인데, 내 경우에는 몸에 닿는 온도가 급변하는 것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감사하게도 이런 상태는 이른 새벽에서 아침까지만 있었다. 해가 뜨면 멈추니 견딜만했다. 그런데 오늘저녁 먹고 스르르 잠든 채로 3~4시간 있다가 깨서 양치하고 자려는데 코 안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열심히 비강을 비워주고 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거실로 나와버렸다.


돌아보니 비염이 극심했던 날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쯤 선선한 바람이 불던 날. 등교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아침 자율 학습 시간부터 영 심상치 않았다. 스산한 느낌이 피부를 스치더니 재채기가 시작되었다. 얼른 체육복 바지를 꺼내 입고 교복 재킷으로 상체를 덮은 후 책상에 엎드렸다. 재채기는 멈추었지만 이대로는 온도 변화를 차단하기 힘들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친구들이 공부하는 걸 방해할까 걱정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기의 흐름이 멈추고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민감하던 코가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엎드려 킁킁 거리는 나를 위해 친구들이 하나둘 씩 자기 재킷을 덮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급우들이 잘 말해주어서 선생님도 나를 따로 터치하지 않았고, 하루를 따스하게 지낼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 일어나 보니 비염은 멈춰있었고 기분은 무척 상쾌했다. 덮어주었던 상의를 찾으러 온 친구들을 보고 꽤 놀랐다. 평소 이야기를 많이 해보지 못했던 아이들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한다는 건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처음 배웠던 것 같다. 친구들이 선사해준 하루가 고마웠다.


착각했나 보다. 늘 뛰어난 면모를 보여야 하고 학업성취도가 우수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예습, 복습하고 수업시간에 발표하고, 졸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그때에는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잘 살고 있다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사랑받을 수 있다. 몸이 아파 누워있을 때, 좌절해서 울고 있을 때 자신의 나약함이 싫어지는 그 순간이 사랑받기 최적의 상태다. 아플 땐 쉬어도 되고, 슬플 땐 울어도 된다. 오랜만에 킁킁거리는 내가 첨에는 싫었고 며칠 지나 걱정되더니 지금은 불쌍하고 가엾다. 몸에 염증이 많아진 것 같다. 약해진 몸을 위해 건강식을 준비해주고, 운동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살았더니 몸이 삐졌나 보다. 나를 위해 살아주는 몸을 이제 사랑해줄 차례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Luisella Planeta Leoni님의 이미지 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랑은 사랑을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