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로스쿨]을 보면서
드라마 초반 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로스쿨이 영상으로 소개된다. 어릴 적부터 상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아름다운 건물과 인테리어에 반해 한국대 로스쿨에 입학하고 싶어 졌다. 아름다운 캠퍼스와 선의의 경쟁이 펼쳐질 것만 같은 도서관을 보니 눈물이 났다. 원작가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분의 꿈이 법관이 되는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로스쿨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써 줘서 고마웠다. 또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런 상상 놀이가 몇 분 되지 않아 산산조각 나버렸다. 스릴러, 추리, 수사 이런 장르를 즐겨본다. 배우 김명민도 엄청 좋아한다. 그의 출연작을 일부러 찾아보기도 할 정도다. 그러나 그를 로스쿨에서 만나는 건 유쾌하지 않았다. 애정 하는 배우가 범인으로 몰리고, 그 주된 장소가 로스쿨이라는 건 정말 참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로스쿨은 내 안에 로망으로 남아있어야 하니까! 절대 그 망상이 깨지는 건 싫으니까.
부모님을 위해 판사가 되고 싶었다
아마 6살 여름이었을 거다. 엄마와 나는 마루에 앉아 있었다.
"나오미야, 아빠는 3가지 꿈이 있었대."
"꿈?"
"응. 재미있게도 3가지 모두 '사'자가 들어가네."
"그게 뭐야?"
"아빠는 어릴 때부터 육사도 가고 싶었고, 판사도 하고 싶었고, 목사님도 되고 싶었대"
"육사, 판사, 목사?"
"응."
당시 아빠는 법원에서 일하고 계셨지만 판사는 아니었고, 육사에 가기에는 나이가 많았고 목사를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냥 엄마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보니 군인이 되는 건 별로 상상이 안 되었고, 목사님도 나랑은 안 어울릴 것 같았다. 그냥 판사가 되고 싶어 졌다. 부모님이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정했나 보다.
포기하기 힘든 '법관이 되는 길'
중학생 때까지는 마냥 확신했었다. 판사가 될 것이라고.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고 머리가 커지면서 판사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그 이유가 순전히 나의 명예, 권력욕, 소유욕 만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는 걸 깊은 생각 속에서 발견했을 때 섬뜩했다. 또한 판사로써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매우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수능 때까지 열심히 일단 공부했다. 왜냐면 다른 진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여유도, 다른 걸 하고 싶다고 말할 용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IMF로 재수를 지원해주시겠다던 아빠의 확언이 물거품이 되고, 평생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교사들 곁으로 가게 되었을 때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그때 삶의 의지를 다 상실해버렸는지 사법고시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법전 하나 사지 못했다. 아니 사러 갈 생각도 못했다. 집은 망하기 직전이고 나는 암흑 속을 걷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중 사법고시가 완전히 폐지되더니 법학 전문대학원(로스쿨)이 등장하였다. 혼자 공부해서 사시 패스를 하는 건 어려워도 로스쿨에 들어갈 수 있다면 공부해서 변호사 시험을 칠 수 있지 않을까 늘 상상했다. 그러기에 최근까지도 로스쿨은 나의 로망의 장소였다.
로망과 현실의 괴리, 새로운 꿈
드라마 [로스쿨]에는 참 이기적이고 못된 인간들이 잔뜩 나온다. 자신의 뺑소니 사고를 숨기려고 아동 성폭행범을 풀어주는 검사, 그 검사의 조카로서 삼촌에게 자수를 강요하는 학생, 자기 성적에만 관심이 있는 대다수의 학생들, 뇌물을 선물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국회의원, 자녀의 성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동원해 낮은 점수를 준 교수를 직위해제시키려 하는 학부모, 살해 의혹을 받게 하려고 증거를 조작하는 교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착한 사람인 척하며 타인을 속이는 자. 이런 그들의 주변에 뺑소니 검사를 덮어주는 대신 감형을 받은 아동 성폭행범이 돌아다닌다. 한 마디로 끔찍하다. 게다가 그들은 등장인물 중 가장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강솔 A라는 학생을 늘 경멸한다. 그가 법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것으로 인해 늘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바보 같다 여긴다.
매 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내 로망은 조금씩 부서져갔다. 내 상상 속의 법대나 로스쿨에는 세상의 정의를 위해 공부하고 법조인이 되는 사람들, 즉 강솔 A들만 살고 있었나 보다. 나는 약한 사람들의 대변인이 되어주고, 이기적인 변호사들에게 넘어가지 않는 강직한 법조인이 있어서 법의 질서가 구현되는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안에 살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을 파악하고 나니 로망이 멈춰버렸다.
그런데! 재미난 건! 로스쿨 진학을 완전히 포기하고 나자 22년 만에 꿈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세상에 사랑, 자유, 평화로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빛을 선물하자.'는 것. 법대 진학 실패는 꿈꾸는 일을 포기하면서도 마음의 족쇄가 되었나 보다. 로망과 상상 속에 갇혀 있던 내가 족쇄를 풀고 감옥 밖을 나와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고등학생 때 판사가 되는 길 앞에서 주저하던 나에게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되고 싶을 만한 것이었기에 엄청나게 기뻤고 삶의 에너지가 심각하게 충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를 꿈꾸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억압 속에서 버티고 있는지 조금씩 깨닫게 된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상황에서 오는 압박보다 자기 자신이라는 울타리, 감옥, 기준, 틀, 껍질 안에 갇혀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로망이었던 '로스쿨'이라는 곳이 상상 속에서 깨져버려 한동안 드라마를 보기 싫었다. 그러나 완전히 붕괴되고 나자 오히려 거리를 두고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더 이상 로스쿨을 로망하지도 열망하지도 않으니까. 지금 내가 꾸는 꿈이 로망보다 훨씬 크고 멋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