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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자 아버지의 마음을 아십니까?

미안해요, 아빠... 그리고 사랑해요!

by 김효주

읍내에 나갔더니 문을 닫은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자영업 하시는 분들께는 이 겨울이 견디기 힘드실 것 같아 걱정스럽다. 코로나 19로 인해 방역이 강화되어 5인 이상 모임이 금지되자, 영업을 하지 않는 것이 하는 것보다 나은 상황이 되고 있다. 3차, 4차 재난 지원금을 보태준다고 해도,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정이 크게 달라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우리 아빠도 자영업자였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빠는 사법고시를 준비하시다 지병의 악화로 인해 시험을 포기하셨다. 그 후 법원 공채시험에 합격하셨다. 그래서 어릴 때엔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지냈다. 한편, 과도한 업무, 부담스러운 직위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으시던 아빠는 다른 부서로의 이동을 요청하셨다. 조정을 원치 않았던 윗선의 방침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퇴직하셨다. 약 5년 후 법무사 자격 취득이 보장된 상황이라 주변 어른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아빠의 확고한 뜻을 아무도 꺾지 못했다.


그 후, 미리 취득해 두신 자격으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하셨다. 안락했던 공무원 아파트를 떠나 우리 가족은 전세방으로 이사했다. 초반엔 인지도가 낮아 사업이 힘들었으나, 부동산 중개인으로서의 전문성, 풍부한 법률지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셨다. 갓 사법고시를 통과한 젊은 변호사들이 법률 상담 요청하러 올 정도로 아빠의 실력은 대단하셨다.


1990년대 중반, 아빠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해갔다. 부동산 매매뿐 아니라 상속이 걸린 땅이나 건물에 대한 등기, 이전, 재산분할까지도 척척 해내셨기에 더욱 인기가 있으셨다. 그래서 부동산에 관련된 무가지(예: 가로수, 교차로 등의 대금을 받지 않고 지국에서 제공하는 신문)를 발행하기까지 이르셨다. 안동시에 있던 매물들을 종류별로 나누고, 보기에 편하게 기획하여 펴냈다. 사업이 잘되던 어느 날 아빠는 말씀하셨다.

"OO아, 마음 놓고 공부하려무나. 네가 재수를 하게 되더라도 아빠가 든든하게 지원해줄 테니."

입시에 대한 압박이 많던 고2 초, 아빠의 그 말씀은 걱정 없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사춘기로 낭비했던 시간들을 보충하려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IMF가 터졌다. 아빠의 사업도 국가부도 상황에 큰 타격을 입었다. 경기가 없으니 매물도, 매매도 없었다. 그 많던 수입도 투자하는 쪽으로 사용하다 보니 남은 것이 없었고, 가정형편은 마이너스 통장 신세를 져야 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여러 큰 사건들로 나라가 시끄러웠고, 근심 중 치른 수능시험은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라도 아빠가 재수를 지원해주길 바랬다. 그러나 아빠는 수능 성적에 맞춰 교대를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6살 때부터 꼭 가고 싶었던 법대를 19살에 갑자기 못 가게 되자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직원들 중의 여성의 비율이 높아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이니 교대로 진학하자고 하시는 말씀은 귓등으로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 얼굴을 보니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살아보겠다고 가족 모두 경기도로 이사했다. 그러나 2000대 초, 대한민국 천지 불황이 아닌 곳이 어디 있었는가. 마이너스 통장에 남은 것은 몇 십만 원이 고작인데, 아빠 사무소에는 파리 한 마리 들어오질 않았다. 지방 교대로 진학한 나는 차비 빼고 용돈이 없다고 징징거렸고, 경기도로 전학 온 고등학생 동생은 분식집에서 떡볶이 사 먹을 돈이 없어 친구를 피해 다닌다며 울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아빠가 법원에 계속 근무하셨더라면 좀 더 윤택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지만 10년이 채 되지 못해 퇴직하면서 알게 되었다. 아빠가 얼마나 법원에서 힘드셨을지. 부당한 일이 너무 많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족들 걱정할까 싶어 세세하게 말하지 못한 아빠가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비록 수입은 일정하지 않아도 자기 만의 사무실을 가지게 되었을 때, 아빠가 얼마나 자유롭고 즐거우셨을까. 하나 누릴 수 있는 자유만큼 쪼들리는 가정형편으로 인해 엄마에게 얼마나 미안했을까. 그래도 90년대 중반까지는 자신의 선택이 맞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 텐데... IMF 때, 큰 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법대가 아닌 교대로 방향을 전환시켜야 했을 때, 담담한 얼굴 말하던 아빠가 나보다 얼마나 더 속상했을까. 작은 딸이 용돈이 없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걸 알았을 때, 작은 손에 쥐어줄 쌈짓돈 없어 얼마나 비참했을까.


답답하고 아픈 마음들 때문일까. 아빠는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 형제자매들, 처가 식구들까지도 내 식구처럼 보살피고 사랑하던 아빠. 딸들에게 늘 바른 길을 가르쳐주시던 아빠. 그렇지만 자신은 어디 도움받을 곳도, 마음 털어놀 곳도 없었던 아빠.


아빠, 많이 힘드셨겠네요.

실은... 아빠의 괴로움 따위 알고 싶지 않았어요.

나만 괴롭다고 믿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아빠. 돌아가시기 전에 알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 알아서 미안해요.


아빠, 지금 세계는 코로나 19라는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로 인해 마비되었어요. 특히 자영업 하시는 분들이 많이 힘들어하셔요. 월세 때문에 걱정해야 하고, 매물이 없으면 잠을 못 주무시던 아빠도 자영업자셨네요.


교대,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등록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던 교대가 아니었다면 대학에 가보지도 못했을 텐데... 곧 가정경제가 부도가 나게 생겼는데 그것도 모르고 법대 못 간다고 울상이었던 큰 딸을 용서해주세요. 직장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교사 생활을 만족하지 못했던 것도 용서해주세요. 아빠는 정말 가진 것들 전부를 주셨는데 감사하지 못했던 것 용서해주세요.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사랑해주고 품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내 꿈을 이루어주지 못한 아빠를 용서합니다. 아빠가 우리 가족을 위해 희생한 것들을 이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빠, 오래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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