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처럼 주변을 살피자
광화문의 한복판, 서촌의 북적이는 골목, 성수동의 소개팅 행렬 속에서도 나는 조용한 곳을 찾아 헤매었다.
오래된 구도심의 부조화와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들 속에서 고양이처럼 주변을 찾아다닌다.
그렇게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나의 취향에 꼭 맞는 공간이 나타났다.
많은 인파 속에 섬처럼,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도 이어폰과 수첩만 있다면, 나의 세계를 찾을 수 있었다.
다음은 그동안 헤매었던 나의 작은 세계를 찾기 위한 여정 중 일부이다.
2023.10.09. (월)
나는 어쩌면 이제 새로운 능력 하나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한글날 연휴 김동률의 콘서트를 기다리며 코엑스의 테라로사에 앉아있다.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가득한 쇼핑몰을 헤치고 도심공항이나 전시장 근처로 오면, 인파를 피해 내 몸 하나 뉘일 곳이 나타난다.
지하세계에서 한 층만 올라와도 조용하고 나름 한적하다.
김혼비 작가의 <다정소감>을 읽으며 그중 ‘한 시절을 건너게 해 준’ 글귀에 마음이 멈춘다.
내게 한 시절을 건너게 해 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2021.09.24. (금) 13:55
추석 연휴가 끝나고 검은 날짜의 (목), (금)이 연달아 있어 9일 동안의 짧고도 긴 가을 방학이 지나가고 있다.
지금은 오후 2시경 햇빛이 내리쬐는 안국역의 2층, 아니 3층의 찻집 토오베.
피치 얼그레이 아이스크림 소다와 무화과 몽블랑은 정말 감동스러운 맛이다.
특히 무화과 몽블랑은 가을 메뉴로 밤잼과 부드러운 치즈를 베이스로 피스타치오가 고소하게 씹히고 레몬 필링이 산뜻하게 마무리를 해 준다.
내가 오늘은 이걸 먹으러 서촌을 헤매었구나!
가을을 한 입에 담는 맛이라 할 수 있겠네.
옆에는 어젯밤 먹고 싶었던 크림이 잔뜩 든 도넛이 네 개나 있다. 와우 신나라.
큰 창 밖으로 보이는 교차로의 횡단보도를 보니 시부야의 유명한 교차로가 생각나기도 하고, 인사동 오래된 골목길을 보니 교토의 어느 조용한 찻집이 떠오르기도 하는 신기한 곳이다.
주인분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무한루프 반복되는 bgm이 어느 전시회에 온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오늘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요시고 사진전을 보지 않은 것도 충분히 위안이 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그런지 두 시간의 이용 시간이 꽤나 야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뭐 그래, 좋은 전시도 두 시간이면 아주 충분하지 그래.
3시에는 여길 떠나서 다시 집으로 향해야 한다.
11시 반에 서촌에 도착했으니 3,4시간의 짧은 기행이지만 혼자만의 코스로는 매우 넉넉하다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창밖의 신호등이 열댓 번 바뀌어, 사람들이 길을 가로지르는 것을 본 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밖을 나서겠지.
그리고 나 역시 무수한 인파들 속으로 파도처럼 밀려서 어딘가의 길을 건너도 있을 것이다.
잠시 머무는 이곳이 세상의 파도를 조금 비껴 난 곳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내가 바깥의 분주함에 지쳐서였는지도 모를 것이다.
2020.08.12. (수) 14:27
여름방학 2주 중 혼자 찾은 서촌,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곳.
비가 2주의 여름방학을 다 지워버렸다.
그중 오늘은 비가 소강상태여서 아무 생각 없이 서울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서울역으로 와서 수많은 점심시간대의 회사원 행렬과 노숙인 행렬을 지나쳐서 효자동 무궁화 공원에 왔다.
그 옆에 카페 ‘큔’에 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맛있는 비건 메뉴 멸치 페스토 샌드위치와 청량한 진저에일을 먹었다.
느릿느릿 조곤조곤 말소리가 책을 읽고 멍 때리기 최적이었다.
혼자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옆자리 말소리들이 들린다.
각자의 사연을 안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남자분 두 분이 점심으로 이걸 드시면서 사진을 찍고, 아내가 좋아할 것 같은지 이야기를 나눈다.
다음은 저번에 실패한 노멀사이클코페.
그러네. ‘사이클’이라서 자전거 그림이 있었구나.
좁다란 계단을 3층까지 올라가면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나타난다.
문을 열자, 약속이라도 한 듯 책을 읽는 여러 사람을 보았다.
운이 좋게 바 자리에 앉아서 파나마 게이샤 아이스드립을 먹었다.
음, 오빠가 내려주는 드립만큼 맛있는데. 나중에 말해줘야지.
커피의 얼음을 녹여 먹으며 책을 꽤 읽었다.
오빠가 궁금해하는 두 종류의 원두를 샀다.
싸진 않은 듯한데, 원두를 사려하자 빛나는 그분의 눈동자를 봤다.
커피를 직접 볶고 내리는 사람의 열정 같은 걸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시며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물어보라는 친절한 말씀을 남기셨다.
오, 나는 이렇게 무언가를 팔고 제공하는 분의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좋아한다.
집에 가기 아쉬워 바로 옆 200 걸음 걸으면 갈 수 있다는 ‘이이엄’ 찻집에 간다.
여기는 커피와는 다른 차만의 각자의 분위기가 흐른다.
첫 차는 대만의 아리산 우롱차.
청향(?)이 나는 풀향이 나는 깔끔한 홍차인 것 같다. 녹차인가. 아니 우롱차.
차를 세차하고, 배수(?)하고 두 번째 차를 내려주신 후, “다관을 잘 부탁합니다” 하시곤 계단을 내려가셨다.
다관을 부탁한다는 말씀이 너무 따스하고 귀여워서 한참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5,6잔을 내려마시며 든 생각은 작은 차 주전자에 맞는 뚜껑을 여닫는 행동 하나, 물을 따르는 행동 하나, 잔을 들고 마시는 행동 하나하나를 하면서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는 것이었다.
아니 미세하게 떨리는 게 아니라 달달달.
그러면서 흔들리는 내 손을 보는 나 자신이 낯설었다.
그래, 혼자 갖는 차시간은 이렇게 흔들리는 손, 흔들리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행위구나.
차를 우리고 비우고 반복하며 여전히 흔들리는 손을 본다.
점차 마음은 평온해지고 더운 여름 여기를 찾아오느라 흔들리던 내 호흡도 차분해진다.
커피와는 다른 차의 세계.
세상 다른, 어쩌면 극단의 성향의 사람을 연달아 만난 느낌이 들었다.
2018.05.25. (토) 16:11
‘5월의 끝자락이었고, 날이 더웠다.’
로 시작하는 존 버거의 소설을 이제 한 챕터 읽었다.
성수동 오르에르에서.
성수동과, 존 버거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친구가 선물해 준 책이다.
시간과 장소.
시간은 흐르고 변하지만 장소는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시작과 끝은 있지만 그 흐름은 분명하지만 시작점과 종점은 유한하지 않죠.
작가의 리스본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를 읽으며 시간은 유한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을 보았어요.
순간과 찰나가 모여 영원이 된다고 했던가?
거창한 말을, 철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도로의 풍경이 바뀌고, 건물이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져도, 사람이 왔다가 떠나도,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장소는 그렇기에 의미를 가지는군요.
모든 건 죽음으로부터 시작됐어. (중략) 그러니까 모든 게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는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야. 그리고 탄생이 뒤를 따랐어. (중략)
더도 덜도 아닌 처음에. 그러니까 죽음이 있은 후에, 손상된 것들을 고칠 기회를 제공받았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란다.
존. 고치려고. (중략)
우리는 망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란다.
글을 쓰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용기는 생겨날 거다.
네가 찾아낸 것을 쓰고, 그걸 우리에게 알려주는 호의를 베풀렴.
오늘 무더운 5월의 끝자락에 나는 성수동에 왔고, 책을 읽었고, 곁에는 없지만 떠오르는 두 사람에게 줄 작은 선물을 샀다.
이 선물이 그 혹은 그녀의 손에 닿을 상상을 하며. 누군가의 선물을 산다는 건 너무나 즐거운 일이다.
2017.08.10. (목)
일주일 전에 나는 후쿠오카의 한복판에 있었고 지금 나는 광화문의 한복판에 있다.
오후 1시.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란, 굉장하군.
그들에게서 한 발짝 비껴 난 카페의 한 구석은 시끄럽지만 아늑하다.
나도 저들 무리의 한복판에 있을 때도 있었지만.
살짝 비껴 난 틈 사이로 이와 같은 여유로움을 갖게 되다니.
그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알지 못하던 풍경과 감정을 마주한다.
이 커피를 마시고 나는 광화문 교보문고를 들릴 것이다.
완전한 이방인처럼 여행객처럼 이곳저곳을 기웃댄다.
그들은 바쁘고 나는 느릿느릿. 여기는 지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