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행

나만의 단축키

by soft breezes

어떤 상황에서 나만의 매뉴얼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습관이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연말에는 특정 숙소에서, 같은 이와 같은 곳에서 사진을 남기고, 비슷한 것들을 먹고, 늘 그러하듯이 노천탕에 간다고 한다.

기념일에는 항상 가던 음식점에 가서 항상 먹던 메뉴를 시킨다고 했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마음이 편한지, 기분 환기가 되는지를 알게 되는 과정이 꽤 흥미롭다.

내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을 때 그렇지 않은 것을 깨닫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즐겁다.

모두가 나만의 단축키를 조금씩 업데이트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디테일한 단축키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정에서, 이런 날씨에,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면, 단번에 내 기분이 나아진다는 것을 수집하는 중이다.

이렇게 흐린 날에 서촌에서 어쩌면 무용한 것들을 보고, 늘 그렇듯 mk2 골목을 서성이다가, 교보문고에 들러 구경을 하다 돌아간다.

씨네큐브에서 뒷북이지만 ’괴물‘을 보고 싶었고, 그 근처의 ’벌새‘라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과 구입한 책을 읽고 싶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오늘 자유의 몸! 남편과 아이는 스키장에 가고 하루 동안의 시간이 덩그러니 남았다.

길어지는 빗줄기에 코트가 축축해져도, 얼굴로 들이닥쳐도, 어쩜 다 괜찮은 건지. 하하.


수험생도 아니면서 수험생의 기분으로 의미 없이 펜과 지우개를 고른다.

워낙 초록색 덕후이므로 가장 마음에 드는 초록색 잉크펜을 찾아냈고, 그와 잘 어울리는 주황색 펜도 세트로.

‘역시 일본 펜은 짜릿해.’하면서. 내가 어릴 적 동경했던 메이드인 재팬으로.

모든 물가는 다 치솟았지만 펜 가격은 다행히도 그대로여서, 더욱 그때가 생각난달까.

부담 없이 1500원짜리 두 개를 사본다.


오감으로 기억되는 경험은 정말 무서워서, 펜 몇 자루를 테스트 용지에 끄적이는 것만으로 우성프라자에서 맥주사탕 사 먹던 1층 ‘모닝글로리’가 기억나니까.

나 혼자만의 자유 시간이 생긴 오늘, 역시나 의미 없이 펜 고르고 서점을 서성인다. 예전의 내가 그러했듯이 시집 하나를 사냥하기 위해 왔다. 그리고 단번에 찾았지. 내가 오늘 찾던 문장. 소다색 표지의 ‘샤워젤과 소다수’라는 시집. 2022년 등단한 고선경 시인의 책. 시집 안에 식재료 이야기가 많아 골랐다.


‘너에게는 멸종된 과일 향기가 난다’ 거나,

‘상추를 씻다가도 나는 얇아진다 / 물기를 탈탈 털고 나면 뜯어 먹힌 얼굴을 하고 있다’는 문장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단 말인가.


서점에서 우연히 펼친 몇몇 장이 마음에 쏙 들어 가슴에 품었다.

열 때마다 ‘달고 끈적이는 슬러시’나 ‘무한히 터지는 탄산수’, ‘땅콩이 없는 자유시간’ 같은 것들이 쏟아졌다.

작가는, 분명, 나처럼 먹는 것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이일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나는 몇 장을 뒤적이는 것만으로 오늘에 딱 맞는 나만의 문장을 찾아냈다. 뿌듯하다.

광화문 교보에서 문장을 사냥하는 일은 이토록 나에게 좋은 자극을 준다.

나는 요즘 쓰지 않고 그저 읽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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