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 안 하는 법 좀 알려주세요

나이가 들어도 어려운 것

by soft breezes

어려서부터 긴장과 걱정과 불안을 다루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낯 가리는 건 물론이고, 새로운 사람을 경계하고, 과도한 생각으로 밤잠을 설칠 때도 많았지요.

특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울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다행히 나이가 들면서 조금 괜찮아졌지요.(그런 줄 알았어요.)

어렸을 때는 혼자서 은행, 슈퍼, 병원 가는 것도 무서워했지만, 크면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사랑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하고 후회하는 것이 백배 천배 낫잖아요. 그건 연애든 일이든 취미활동이든 모든 것에 해당하는 말이었습니다.

대단히 충동적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다 보면 용감해지니까요. 방송작가교육원을 기웃거렸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에세이 말고 다른 장르의 글은 어떨까. 그래,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하고 후회하는 게 나으니까. 그렇게 덜컹이는 9호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거 진짜 괜찮은 걸까.

곧 복직인데 복직 준비나 할 것이지 막판에 일을 벌이다니 너무 무모한걸.

왜 하필 그때 교육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모집일정을 보게 되었을까. 집에 가고 싶다 당장.


심지어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심장 박동은 빨라지고, 얼굴이 저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최근에 보았던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한 장면이 생각나면서 이거 지금 교육원이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번 출구로 나가서 곧장 스타벅스로 향한다. 이 와중에 수영 끝나자마자 왔다고 배는 고프네.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더 빨라지는 심장 박동수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오렌지 주스와 샐러드를 시켰다.


만 천 원.

겨우 삼십 분 있을 거처의 비용으로는 꽤 비싼 걸. 그래도 할 수 없지. 심신의 안정을 주는 익숙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오물거리며 샐러드를 집어삼켰다. 여의도 카페의 수많은 (아마도) 직장인들을 둘러보며 나 또한 야근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단지 수영을 하고 왔을 뿐이다. 직장인 코스프레를 하며 지친 표정으로 짐을 챙겨 금산 빌딩으로 향한다.


이렇게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십 분이나 일찍 오다니 나 좀 멋진걸. 강의실에는 벌써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있다. 문을 당긴다. 어라, 안 열린다. 옆에 문도 마찬가지. 여기가 아닌 걸까. 이전 수업이 안 끝났나. 복도에 있던 누군가가 말한다. "밀면 열려요." 어이없다. 문 하나도 못 열 정도로 긴장한 건가.


일찍 온 자의 특권은, 맨 뒷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엔 그렇다. 고요하다. 역시 뭘 먹고 오길 잘했어. 오랜만에 학생이 된 느낌, 독서실에 온 느낌 나쁘지 않은 걸. 나는 여전히 야근하는 직장인 코스프레를 하며 기지개를 켜 본다. 역할에 너무 몰입했나. 하품이 나온다. 삼십 여 명의 사람들이 가득 차고 작가님이 들어오신다. 수업이 시작되자 무려 출석 체크도 하고(이게 몇 년 만이야), 반장과 총무도 뽑고(어머나 세상에), 전반적인 오티를 마쳤다.


오기를 잘했어.

지하철에서 긴장감에 정신이 혼미하던 사람 맞나. 작가님의 말씀을 끄적이다가 끄덕이다가 하다 보니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이야기의 힘을 믿기 때문에 왔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 가기 전에는 내가 나를 원망하며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돌아가는 길엔 왠지 모르게 힘이 났다. 이제는 야근한 직장인 모드가 아니라, 당장 하고 싶은 일이 생긴 사람처럼. 작가님 말씀대로, 너무 심오해지지 말고 진지해지지 말기로 했다. 미리 걱정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해 보는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서 맥주 다섯 캔에 만 이천 원이라길래 가방에 잔뜩 담았다. 주차된 차에는 아직도 축축한 수영 가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오늘을 기억할 거야. 어쩌면 일주일에 한 번 여기를 오는 것이 오히려 숨이 트이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처음 한 번이 제일 어려우니까, 다음번부터는 좀 더 나아지겠지.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이여,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마음이여. 긴장했지만 긴장 안 한 척하는 법만 늘어나는구나. 어디 긴장 안 하는 방법 좀 알려주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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