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색을 띤 남자

나는, 오규현

by 에이포

한 남자가 무대 위로 입장한다. 남자의 몸에는 여러 색의 색종이들이 붙어 있다. 색은 빨강,파랑, 초록,노랑 등의 평범한 색깔도 섞여 있지만 대체로 적분홍,보라색,흑녹색,체크무늬 등 보기 드문 색을 위주로 이루어져 붙어 있어 색의 배열이 부조화스럽게 느껴진다. 한손에는 새장을 들고 있다. 새장 안에는 다채로운 색을 띈 앵무새가 앉아 있다. 무대 위의 탁자에 새장을 놓은 뒤 새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남자가 앉는다.


남자의 대사는 앵무새를 통해 이야기된다. 복화술이 됐건, 녹음된 목소리를 타이밍에 맞게 재생하는 방식이건 상관없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남자는 무대 위에서 기본적으로 입을 열지 않는다. 적어도 남자가 입을 열고 목소리를 내는 극의 클라이막스에 이르기 전까지는 계속 입을 다문 채로 행동한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는 창살 있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남자가 앉은 뒤, 앵무새가 부리를 움직여 첫 대사를 말하면 극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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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시작한다 이제 올라가야 해. 잠깐만 근데 첫 대사가 뭐라고?


<남자, 얼굴을 찡그리며 새장 앞으로 가서 앵무새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남자:(관객석을 본다) 죄송합니다. 이 새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얘기를 들은 다음에 따라서 말하는 것은 귀신같아서 한번씩 이렇게 안해도 그만인 엉뚱한 말도 내뱉곤 합니다. 합니다만, 나는 이 새가 좋습니다. 귀여운 애완동물은 아니지만 멍청해보이는 구석이 있어서 썩 마음에 듭니다.


<남자 다시 돌아가 앉는다>


남자: 이 새는 세상에 하나뿐인 희귀한 새입니다… 적어도 나와 이 새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남자 몸에 색종이 하나를 뜯어내 바닥에 버린다) 방금 대사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빌려온 말입니다. <어린 왕자>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오래전 몸 안에서 무뎌진 응어리가 느껴질 정도의 씁쓸함과 어느 날 아침에 맑개 갠 하늘과 봄 풍경을 보았을 때와 같이 막연하고 그리운 행복감을요, <어린 왕자>에서 나는, 그 서로 전혀 반대편에 있는 것 같은 두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남자, 떨어진 색종이로 꽃을 접는다.>


남자: 내가 빌려온 말은 어린왕자의 별에 사는 장미꽃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라고 하는 지극히 합리적이면서도 경이로운 신화를 믿는 장미꽃의 얘기는, 나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여러 색깔을 두른 채로 앉아서, 직접 말하는 대신 저기 앉아 있는 새의 입을 빌려 말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조금 뜸을 들였다가)내가 초등학교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앵무새:(남자의 말을 따라한다)초등학교 때 있었던 일입니다 초등학교 때 있었던 일입니다 벌써 진부해!


<남자 새장 쪽을 흘깃 본다. 잠시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이어간다>


남자: 맞습니다. 어린시절의 일화에서 얻은 깨달음을 설파하는 방식도 이제는 많이 진부해진 패턴입니다. 관람석에서 진부함을 마주할 때 느껴지는 달갑지 않은 기분을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얘기들은 어느 정도 진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여러분들도 내심 진부함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진부하지 않은 것들만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이 광경은 내 몸의 이것들만큼이나 괴상하게 느껴질 겁니다. 좋습니다. 대신에 (일어났다가 무대 정면이 아닌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다시 앉는다.) 이러고 앉아 얘기하겠습니다. 이렇게 앉으면 여러분이 느끼는 진부함도 덜하겠지요. 나의 어린시절을 돌아보는 겁니다.


<남자, 몸에서 노란색종이를 떼어낸다. 작은 크기로 찢어 손에 들고 이야기한다.>


남자: 국어시간에 교실에 호박벌이 들어왔습니다. 내 엄지손가락보다도 작은 노란 괴수를 피해 도망다니면서 소리지르는 아이들 때문에 교실이 어수선해졌습니다. 그때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벌의 침은 방어수단이기 때문에 가만히만 있으면 찔릴 일은 없다는 걸 말입니다. (작은 크기로 찢은 종이를 머리 위로 이리저리 갖고 논다) 벌이 다시 교실 창문으로 나가자 어수선했던 교실은 다시 수업하자는 선생님의 말에 금새 진정됐습니다. 단지 한 아이가 무심하게, 방향도 의미도 없이 툭 뱉은 말이 들렸을 뿐입니다.


앵무새: 벌 같은 게 왜 있는 거야? 나비처럼 예쁘지도 않은데.


<남자, 들고 있던 벌을 툭 떨어뜨린다.>


남자: 어린 나는 그 말에 무척이나 분개했습니다. 게다가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벌을 좋아합니다. 벌이 아름다워서는 아닙니다. 벌이 만들어내는 달콤한 꿀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에게 벌이 필요없다는 다른 아이들의 반응이 바보처럼 느껴졌습니다. 씩씩대며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를 붙잡고 있었던 일을 얘기하니 엄마는 웃으면서 나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제야 어린 나는 화를 내려놨습니다.


<떨어트린 노란 종이를 다시 줍는다>


남자: 어쩌면 어린 나는 화난 것이 아니라 불안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른 명이 넘는 교실에서 나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 교실에서,어쩌면 이 세상에서, 나만.


<색종이를 하나 더 뜯는다. 종이 가운데를 작고 동그랗게 구멍 두개를 내서 오린다.>


남자: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의 사건입니다. 우리집에 고모가 놀러와서 함께 거실에 앉아 있다가 부엌에서 엄마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거실에 앉아서 혼자 놀고 있던 나는 고모가 거실 탁자 위에 올려 놓은 작은 유리병을 발견합니다. 나는 고모에게 물어봤습니다. 고모, 이게 뭐야?


앵무새: 그건 고모가 눈을 좋게 하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야.


<남자, 구멍이 두 개난 색종이를 양손으로 집어 들어올린다.>


남자: 유리병 안에는 처음보는 투명 빛을 띈 동그란 물체 두 개가 투명한 액체 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유리병을 열어 꺼냈습니다. (남자, 작고 동그랗게 자른 색종이 조각 두 개를 꺼낸다.) 그리곤 그것들을…(남자,색종이 조각을 입에 넣어 삼킨다.) 잠시 뒤, 이야기를 마친 고모께서 끼고 다니는 콘텍트렌즈를 찾으면서 나한테 봤느냐고 물어봤을 때에도, 그걸 내가 어떻게 했는지 대답했을 때까지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벌인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고모의 말을 듣고 얼핏보면 눈동자와 비슷하게 생긴 그 투명한 물체를 눈에 좋은 영양제쯤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쓰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지만, 쓰다는 말만으로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그 맛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릴 리가 없습니다. 그건 어린 내가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어른의 약이었으니 말입니다.


<남자, 다시 몸을 돌려 객석을 보고 앉는다.>


남자: 나는 엉뚱한 아이입니다. 나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친해진 친구들에게도 종종 그런 투의 얘기를 듣곤 했습니다. 나는 엉뚱한 내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적잖이 창피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불안했습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무척이나 엉뚱한 것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 말입니다. 다행히도 나의 창피함과 불안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남자, 말을 마치고 앵무새를 흘깃본다.앵무새 아무 말 없다.>


남자:이런 속담이 있습니다.(앵무새 남자의 말을 옮기고 말이 없다. 남자,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말을 꺼낸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다시 정적) 아, 옛날 속담중에 이런 말이…


앵무새:(남자의 말을 끊고 앵무새의 목소리로)가재는 게 편 가재는 게편!! 가재는 게편!!!


남자:(앵무새에게 오랫동안 눈을 흘긴다) 죄송합니다…가재는 게편이라는 말이 있듯이, 결국 나는 나를 엉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보다도 엉뚱하고 괴짜인 나의 편이 되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해 못하는 나를 특별한 나라고 여기는 일은 구태여 마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영화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유별난 자신의 모습이 아직 깨지지 않은 알이라고 기꺼이 믿어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특별해졌습니다.


(남자, 등쪽에 붙어있는 종이를 뗀다. 다른 종이와는 다르게 무언가 줄 글로 적혀있다.)


남자: 예전에 내가 구상했던 이야기의 초안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앵무새: 민수네 가족은 4인가족이다. 아빠는 교사이고, 엄마는 간호사이다. 민수는 둘째 아들로, 위로는 두 살 터울의 고등학생 누나가 있다. 민수네 가족은 평범하다. 엄마와 누나는 요즘 가장 인기가 많은 드라마의 애청자이고, 아빠는 순위는 낮지만 가장 인기가 많은 야구팀을 응원한다. 누나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아이돌의 광팬이다. 민수네 가족 중에서 별난 건 민수뿐이다. 민수는 멜론차트나 아이돌에는 전혀 관심없고, 반애들은 아무도 모를 락밴드의 팬이다. 민수는 프로야구는 물론이고, 축구나 야구에는 별 관심이 없는 대신 NBA는 빼놓지 않고 챙겨본다. 민수는 저번에 가족끼리 다 같이 보러간 천만관객영화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훨씬 좋다. 민수는 평범한 가족들과 민수네 가족의 유행사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달에 한 번 요즘 가장 유행하는 영화를 다같이 보러가야 하고, 반강제로 미용실에 끌려가서 엄마가 챙겨 보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의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자르게 하고 주말에 아빠가 좋아하는 야구팀을 응원하러 야구장에 끌려가고 누나가 아이스버킷챌린지를 한답시고 얼음물을 받아오라고 시키고, 무엇보다도 요즘에 유행열풍인 달달한 맛이 나는 감자칩을 먹어보려고 온가족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의무적으로 편의점에 들러야 하는 가족규칙이 생긴 게 정말 너무너무 싫다.


남자: 민수는 내가 그린 나입니다. 남들과 취향이랑 기호가 다르고 유행에 회의적이고 반항적인 청소년, 나입니다. 민수네 가족들은, 그 당시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좋아하지 않았던 것들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수많은 타인들, 벌보다는 나비를 더욱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남자, 색종이를 서너개 뜯어낸다. 무언가를 접으면서 대사를 한다>

남자: 나는 특별한 나보다도 더 특별해지고자 했습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나의 시각, 나의 취향이 더 높이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특이하고 참신한 것들이 내 서랍 안에 쌓입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그런 것들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습니다. 나는 이미 그런 것들에 대해 흥미를 못느끼는 정도를 넘어 일종의 역겨움을 느끼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새롭고, 충격을 받을 정도로 참신하고, 유명하지 않고 어쩌다가 알려진다 해도 호응받지 못하며, 심오한 것들. 그런 것들을 내 서랍안에 꾸역꾸역 집어넣습니다. (종이로 접은 것을 진열해놓는다. 동물조각상이다. 막이 오르고 남자가 떼어냈던 종이들로 접고 만든 것들을 앞에 진열해 보인다.) 모두 내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앵무새: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모두 내가,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남자, 앵무새에게 시선을 옮겨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이 객석을 향한다. 얼굴은 허탈하고 표정이 없다.>


남자: 거짓말입니다. 나는 나를 속일 수 없을텐데도, 나를 속이려고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서랍 속에 들어오는 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것들인지, 특별해서 좋아하려는 것들인지 헷갈렸습니다. 헷갈리기는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둘중 뭐가 됐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특별한 나에게 매달리고 집착한 것입니다. 그 결과, 나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듯한 색종이들로 나를 덮어 특별해진 내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내가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남자 고개를 쳐박고 운다. 한동안 앵무새 입을 움직인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이윽고 남자가 고개를 들자,앵무새의 목소리가 나온다>


앵무새: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잠깐만…. 지금! 이 소리 들리지요? 이거요! 지금 이거요! 들리세요? 조금만 있으면 다시 나올겁니다.


<앵무새 말이 끝나면, 남자 몸을 털어낸다. 색종이도 남자의 몸짓에 따라서 흔들린다>


남자: 이제는 내 몸을 덮고 있는 이것들을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억지였다고 해도 이제 그들도 내 몸입니다. 몰랐던 것들로 하고 돌아갈 수 있다면… 글쎄요.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이제 극도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앵무새: 클라이막스에는 무대 앞쪽으로 밝은 조명 비추고 배우는 새장들고 무대 앞으로 나가! 리허설이라고 대충하지 말고!


<남자, 새장을 들고 무대를 내려가 관객석을 둘러싼 펜스 앞에 선다. 밝은 조명이 남자와 앵무새를 모든 방향에서 비추고 있다. 남자가 헛기침을 한 뒤 자신의 입을 열어서 말한다. 남자의 말은 더듬거리고 어색하다. 띄어쓰기를 의식하면서 일반적인 휴지에 맞게 말하지 않고 조금씩 호흡도 어긋나고 발음도 어눌하다. 앵무새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남자: 나는 내 목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목소리가 있었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대 위에서 여러분께 올린 말들은 나에게 영감을 준 이들의 목소리들을 혓바닥으로 어설프게 바느질한 것 같아서, 오로지 나의 목소리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여기 특별해진 내가, 이 남자가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알아가야 하고 나는 새로운 내 목소리에 익숙해져야합니다.


<남자 이번엔 길게 목을 푼다. 앵무새도 입을 열고 같이 말한다>

남자,앵무새: 잘 들리십니까?


<서서히 조명이 꺼지는 동안 남자와 앵무새는 몇 번이고 대사를 반복한다.어눌하고 어색한 말투가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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