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과 추상화 사이

나는, 이동희

by 에이포

카페에서 그의 잔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날 그의 컨디션을 알 수 있다. 그는 피곤한 날에만 커피를 마신다. 카페인에 중독이 된 사람은, 카페인을 마신 상태가 일반적 컨디션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 하루 거르는 날에는 무기력과 우울을 느끼게 된다고. 그래서 카페인을 특수적인 경우로 만들고 싶단다. 오늘은 차를 주문했다. 손에는 잔이 있었고, 잔에는 차가 있었고, 차에는 얼음이 있었다.

“로또에 당첨되는 게 꿈이라는 사람 중, 로또를 사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간만의 기분 좋은 정적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중이었으나. 이또한 깨기 위한 정적이었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우리 저번에 얘기한 거 있잖아. 그 공부와 재능에 관한 거.”

“우리는 어떤 재능이 없으니까. 공부한다는 거?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남아서 하는 슬픈 경쟁이 공부라는 거?”

그와는 참 이상하다 싶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발의자는 주로 그다. 열심히 들어주려는 성의는 보이지만, 나도 나름의 일이 있는지라 이제는 싫증 날 지경이다. 그래도 무언가 인생을 건 고민을 하는듯한 그의 말투에 한두 마디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내가 발의자인지 모를 정도로 빠져든다. 마침, 슬 공부가 지겨워지고 있는 차였기에 내심 즐겁게 귀를 열었다.

“그래 그거. 내가 어제 로또 사면서 생각했는데, 우리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을까?”

“그게 로또와 뭔 상관인데"

반가워도 조금 피곤하다는 낌새를 보여아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그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끌고 갈 테니까. 그러면 나는 꼼짝없이 듣고만 있어야 하니까.

“로또도 결국 산 사람 중에 당첨되잖아. 그 사람들도 이런저런 경험을 쌓다가 재능을 찾은 거지. 우리가 해본 거라곤 공부밖에 없잖아. 뭐 다른 거 배운 게 있나?”

맞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뭔가 진득하게 해본 게 없다. 공부야 주위 사람들이 계속하기에 따라하는 척이지만, 외의 재능을 알아보려 고민하진 않았다.

“체육은 화상 때문에 생각도 안 해봤고, 미술은 배워봤자 괴작만 나왔는걸. 악기도 영 아니고.”

“그건 나도 알지. 내가 말하는 건 그런게 아냐. 흥미도 있고, 여유도 있었지만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미룬 것들 말이지. 그중에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음... 뭐 그렇게 말하면 아쉬운 게 몇 개 있지. 한번 해볼 걸 그랬어.”


“하고 싶다에서 멈추는 게 많은 것 같단 말이지. 결국 진지하게 고민도 안 해봤으면서 후회만 남아. 사실은 후회할 자격조차 가지지 못하는데"

단호한 듯 말하는 그의 말투가 조금 날카롭기까지 하다. 중심을 잡아야 한다. 잘못하다가는 원색적인 비판이 될 수 있다. 대게 이런 식으로 흘러갔던 대화가 깔끔한 기분으로 끝난 적이 없다. 나를 위해서도 조금의 변론을 해야 한다.

“후회할 자격 조차 못 가진다는 말은 워딩이 센데? 아픈 손가락은 하나쯤 있잖아.”

“그래도 자기가 진정 바랐다면, 이것저것 계산해 봤어야지. 그런것도 안 해보고 후회는 좀.”

“글쎄. 사실 알아보는 것도 주위에 누군가가 있지 않는 이상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건데... 오히려 힘든 것을 모두가 알기에 재능 있는 사람이 존중받는 거잖아.”

“그게 맞는 것 같다. 존중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다시 또 그는 눈을 굴린다. 종종 호기롭게 내센 말에 허점이 있다는 걸 본인이 자각했을 때, 그는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반추한다. 그의 손에는 잔이 있고, 잔에는 반절의 차가 있고, 반절의 차에는 거의 다 녹은 얼음이 있다. 그가 언제 다시 입을 열지 모른다. 어쩌면 저 얼음이 묽은 차가 될때까지 기다려야 될지도 모른다. 갑자기 최근의 일이 떠올랐다.

“로또 얘기를 듣고 생각난 게 있어. 요즘 버킷리스트를 쓰는데...”

다행이다. 그의 눈이 초점을 찾았다. 아마 자신이 고민한 것에 얘기를 덧붙이는 게 좋은가 보다.

“보통 버킷리스트의 시발점은 조금 허황된 꿈이잖아. 뭐 세계여행이나 도서출판 갈이. 그냥 자신의 꿈을 거기에 적는 거지. 근데 그렇게 한번 쓰인 글은... 하기가 힘들어서 버킷리스트인 걸 알아도 미련의 여지를 남겨. 막상 그렇다고 여행 계획을 짜거나 잘 알아보지는 않아. 사실 귀찮은 거일지도. 죽기 전의 나에게 미루는 거야”

“음,,, 로또는 사지 않음으로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거잖아. 근데 여행 같이 큰 것은 아무래도 돈이 필요하다 보니, 우리는 그 돈을 벌기 위한 과정에 있는 거지 않을까.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물론 나중에 돈 모으고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긴 해. 지금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봤자. 제대로 즐길지도 모르겠고, 갔다 오면 허탈함도 있을 것 같아. 그렇다고 내가 직장을 가지면 짐을 챙길 수 있을까? 그때는 또 회사 일이라는 핑계로 퇴직 후에 갈 거라 미루지 않을까? 미루다 보면 어느새 끝을 마주하고 말 텐데...”

조금 감정이 섞이고 말았다. 며칠 전 학교 게시판에서 부동산 임장 동아리 소개를 본 후 더 불확실 해졌다. 대학생이 부동산 하기에는 조금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소득이 늘며 지출도 늘기에 돈 모으기가 쉽지 않은 건 매한가지라는 글. 그래서 우리도 빠른 게 아니라는 글. 우리는 미래가 마치 엄청난 해결책이라도 제시해 줄 것처럼 판단을 유보하고 산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꿈꾼 질문에 대답을 했는가. 아니.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글쎄.

“어렵네. 어려워. 버킷 리스트에 다른 건 안 적었어? 그래 난 세계여행을 하면 세상에 미련이 없어 그런 건 아닐 거 아냐.”


“아까 말한 대로 처음에는 조금 힘들며 부끄러운 꿈이지. 세계여행, 내 책 쓰기, 우주 가보기 그런 것들. 근데 계속 쓰다 보니까 그냥 좋아하는 걸로 채워지더라. 이주에 한번 입욕제 목욕하는 삶 살기. 어느 밴드 공연 가보기 같은 소소한 내용들로.”

“이제야 로또에 어울리는 걸 찾은 것 같다. 네가 말한 대로, 세계여행이 로또라 해도 결국은 로또야. 로또를 산다고 당첨되냐? 여행도 아무리 계획을 짜든 돈을 계산하든, 일이 하나 생기면 물거품이 돼. 근데 입욕제나 공연은 기다릴 필요가 없잖아. 당장 지금도 할 수 있는 것 들인데. 일이 있어서 미룬다고 얘기를 해. 근데 걔네는 버킷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만큼 네가 하고 싶은 삶인데? 지금의 일이 더 중요할까? 당첨이 확실한 복권을 왜 안 긁으려 하는 거야.”

그래, 사실 생각해 보면, 버킷 리스트는 초상화다. 초상화. 내가 바라는 나에 대한 초상. 버킷리스트 초반의 허황된 우리도, 우리가 바라는 우리지만, 후반의 사소한 우리도 우리가 바라는 우리다. 후반의 우리는 지금도 이룰 수 있는데, 왜 계속 미루기만 하는 것일까.

“그렇게 말하면 뭐 할 말이 없긴 하네... 막연한 아쉬움이지. 주말에는 입욕제 하나 사야 할 것 같아. 러쉬 가기가 조금 두렵지만.”

어느새 짧은 대화가 끝났다. 시계를 보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잔은 이미 비워졌지만, 배는 채움을 필요로 한다.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을까 헛된 기대를 하며 까드득 얼음을 씹는다. 얼음에서 차 맛이 조금 난다. 그는 어느새 간데없다. 굳이 찾을 필요도 없다. 당장 내일에, 공부에 싫증을 느끼면 어느새 그는 옆자리에 앉아 있을 거다. 잔을 반납하고, 집까지 천천히 걸어간다. 얼음을 먹어서 위는 시리고 외투를 입어서 살은 따뜻하고, 얼굴은 바람에 시리다. 이 오묘한 감정은 다시 가슴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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