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는, 정다은

by 에이포

만나는 사람마다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었다 싶으면 버킷리스트가 있느냐고 물어봤다. 어떤 사람은 별 고민 없이 술술 이야기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뜸 들이거나 고민하는 듯하다가 얘기했다. 나는 질문하기 전에 그 사람의 성향이나 전에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려 대충 답을 예상해보는 편이다. 나의 예상대로 사람들의 대답은 해외여행이나 액티비티를 즐기는 것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내가 좀 신선하게 있었다. 버킷리스트로 세워 도전하고 싶었던 일 보다, 예전에 이미 세웠던 버킷리스트를 달성한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도전적인 어떤 항목을 달성해서 만족스러웠거나, 처음에 가졌던 기대나 상상과는 달라 실망스러웠다는 평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만족스러웠던 실망스러웠던 그 끝은 굉장히 자신의 삶에 유의미했다는 것이다. 만족스럽고 즐거운 표정으로 말이다.

사람을 만나지 않은 날에는 인터넷에서 버킷리스트와 관련된 글을 찾아봤다. 그 중 굉장히 인상적인 글을 한 편 읽게 되었다. 그 사람의 버킷리스트는 ‘과자 한 봉지를 직접 사기.’ 였다. 암 말기 환자였던 그는 자신의 힘으로 그리 멀지도 않은 병원 안의 편의점에서 과자 한 봉지를 직접 사는 것이 큰 도전이었다.

사실 나는 버킷리스트라는 주제를 듣고 머릿속에 제일 먼저 ‘to-do list’가 떠올렸다. 그 뒤로 내 속에 차오르는 불편함... 지금 당장 내 할 일도 바쁜데,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과 글을 통한 버킷리스트를 보며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보는 것도 정말 귀한 경험이다. 내가 한 것도 아닌데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듯한 상상을 하게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나는 버킷리스트가 어쩌면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취하지 않아도 좋고, 즐겁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저 도망갈 수 있는 구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의미로, 이제부터 내가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버킷리스트를 써내려 보겠다. 최초다!


- 여행

어렸을 적 이야기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고깃집 옆으로 조금만 걷다 보면 만화방이 있었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고깃집으로 가 부모님을 도와 서빙을 했다. 우리 가게는 손님이 없는 날보다, 있는 날을 세는 게 더 쉬웠다. 적적해진 나는 항상 부모님께 딱 400원을 졸랐다. 400원이면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두 권 빌릴 수 있었다.

만화방에 들어가면 아저씨가 나를 곁눈질로 쳐다본다. 나는 인사도 없이 만화방을 세 바퀴 이상을 신중하게 돌았다. 나는 순정 만화를 너무 좋아한다. 그림체가 마음에 드는 작가의 책은 아저씨를 귀찮게 해서라도 꼭 찾아내서 읽었다.

만화책을 읽다 보면 제일 마지막 장에 작가가 이번 만화를 그리면서 일어난 재밌는 에피소드나, 독자들이 보낸 편지에 대한 감사, 작중 인물 간의 서비스 컷 등을 넣어준다. 그런 것들이 왠지 모르게 너무 재밌었는데, 어느 날 그 작가가 자신의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다고 적었다. 그때부터 나는 만화뿐만 아니라 일본 애니메이션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에 대한 환상이 있다. 시끌벅적한 일본의 고등학교, 넓은 강가를 옆에 두고 시원하게 달리는 자전거의 풍경,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 좁지만 아늑한 골목길, 수많은 계단 위에 자리 잡은 한적한 신사.

내 마음의 환상이 깨져도 상관없다. 그 곳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다.


- 필사

우선 대형 문구점에서 손바닥만 다이어리를 산다. 그리고 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고르자. 두께가 두껍지 않은 단편 소설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어린 소녀이기에 아이의 시선이 가득하다. 어른들에겐 화가 나고 울화통이 터질 법한 일도 아이의 시선을 통해 색다르게 묘사될 수 있다.

이왕 써보는 거라면, 이런 책을 베껴보고 싶다. 나는 간혹가다 보이는 사람들의 어떠한 순수함이 좋다. 나를 정신차리게 한다. 나는 어른스럽지도 않은 게, 속에 이상한 철학만 가득하기에 순수함 마주했을 때 부끄럽다. 하지만 이런 부끄러움이 나를 정신차리게 한다.


버킷리스트란, 평소 자신의 반복적이고 계획적인 삶에 갇혀 쌓여있던 것들을 해소할 수 있거나 도전해보고 싶은 것들을 적어보는 것들로 생각했었다. 나의 편협한 시야를 반성하게 되었다. 각자의 삶에서 가장 간절하고 원하는 것들도 버킷리스트로 세울 수 있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시덥잖을 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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