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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막 써도 좋다

by 소기

말은 안 되지만 글은 되지.



말이 문제다. 할수록 늘지만 할수록 위태롭다. 말 때문에 일이 터지면 크게 터진다. 걷잡을 수 없다. 그래서 말이 어렵다. 무섭다. 나 역시 말 때문에 탈이 난 적이 많다. 하면 안 될 말을 하거나,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으면 꼭 탈이 났다. 그러다 보니(1) 말을 할 때 지나치게 신중한 편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2) 상대방이 답답해할 때가 있다. 그 상대방은 주로 아내다. 그러나 보니(3) 말 때문에 아내는 속이 답답하고, 그놈의 말 때문에 나는 속이 시끄러웠다. 말이 참 어렵고 무섭다. 그래서 웬만하면 덜하려고 한다. 그래도 꼭 탈이 나고야 만다.


"잠시만요. 지금 그 말, 취소해 주세요."

"취소? 이미 하고 들은 말이 취소가 되나요? 제가 안 할 걸로 하면 당신도 안 들은 게 되나요? 머리에서도 마음에서도 지워지나요?"

"제 걱정은...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취소해 주세요."

"네 그럼, 취소 도와드릴게요. 됐나요?"


됐을까? 됐을 리가 없다. 이미 말한 걸 하지 않았다고도, 말하지 않은 걸 했다고도 할 수 없다(슬프게도 이런 일은 가끔 일어나지만). 이렇게 말할걸, 저렇게는 말하지 말걸.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하는데, 저 말을 먼저 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이 말은 제대로 하지도 못했잖아. 순서를 바꿀 수도 없다. 참 어렵고도 무서워 덜하려고 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 살면서 말을 하지 않는 게 말이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정리하면,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런데)

이미 한 말은 취소가 안 된다. 고칠 수도 없다. (그래서)

말은 어렵고 무섭다.




글은 참 좋다. 쓸수록 늘고 쓸수록 재미있다. 쓰다 보면 마음이 일렁이고 머릿속에 폭죽이 터질 때가 있다. 그러면 끝이다. 빠져버린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취소나 환불이 안 된다. 그냥 평생 쓰는 수밖에. 계획 없이 떠난 여행길에서 우연히 들른 국도변 휴게소의 자판기 커피맛을 예찬하는 글도 쓰고, 아이가 기가 막히게 예쁜 황금똥을 쌌다는 이야기도 쓰고, 오랜만에 아내의 정수리를 보다 그만 코끝이 찡해졌다는 이야기, 자동차 미션이 고장 났다는 이야기,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야구팀을 응원했다는 이야기, 아침에 버스 대신 콩나물 시루가 와서 타야 하나 물을 주어야 하나 고민했다는 이야기, 심지어 쓸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 그래도 쓰고 있다는 이야기......


말은 안 되지만 글은 되는 것이 있다. 수정첨삭! 일단 쓰고 고칠 수 있다. 모자라면 보태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면 그만이다. 순서도 바꿀 수 있다. 나중에 쓴 것을 먼저 쓴 것처럼, 먼저 쓴 것을 나중에 쓴 것처럼. 그래서 막 써도 된다. 고치면 되니까. 너무 많은 고민 말고 그냥 막 쓰고, 퍼즐을 맞추듯이, 책장의 책을 정리하듯이,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듯이 즐겁게 고치면 되는 것이 글이다. 결정적으로, 아니다 싶으면 '취소'가 된다. 말은 안 되지만 글은 그게 된다. 그러니 그냥, 막 쓰자. 고치면 되니까. 이 좋은 걸 두고 너무 고민하지 말자. 정리하면,


글은 참 좋다. (게다가)

글은 수정첨삭이 된다. (그러니)

막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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