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쨌든 근사한, 쓰는 사람

by 소기

부디 설렁설렁,

'게으른 작자(作者)'가 되시기를.



어쨌든 글쓰기는 근사한 일이다. '글'을 쓰는 것은 안경을 쓰는 것이나 사람을 쓰는 것과는 다르다. 안경을 쓴다고 하면, "아, 안경이요? 그렇군요." 하고 대화가 싱겁게 끝나거나, 실은 라식 수술을 했다는 뜬금없는 고백을 받거나, 레이밴은 디자인은 멋지지만 한국인이 쓰기에는 불편하지요 따위의,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기 십상이다. 사람을 쓴다고 해도, "사람을 쓰신다고요? 사업하세요? 아, 인사(人事) 일 말씀이군요." 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로 흐르고 만다.

그러나 글을 쓴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본적으로 '어머' 또는 '우아'로 시작된다. "어머, 저도 글을 쓰고 싶은데... 주로 어떤 글을 쓰세요?" 하거나 "우아, 대단하십니다. 진짜 멋진 취미를 가지셨군요!" 하며 관심과 존경을 이끌어낸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는 근사한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글짓기'라고 해도 그 근사함은 달라지지 않는다. 밥을 짓거나 죄를 짓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그런데 '밥을 지으며 글을 짓는다, 죄를 지었지만 글을 짓는다, 안경을 쓰고 글을 쓴다, 사람도 쓰고 글도 쓴다'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꽤 근사해진다. 글이 그렇다. 글이 들어가면 전혀 다른 일이 된다. 그 일을 둘러싼 공기부터 달라진다. 조금 따뜻해지고 촉촉해지며 조금 느려지지만 더욱 정확하게 흐른다.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면 글은 주연보다는 조연일 것이다. 밥을 짓고 농사를 짓고 사람을 쓰는 일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글을 짓고 쓰는 순간 마치 신스틸러처럼 눈길을 사로잡고 마음에 또렷한 상(像)을 남긴다. 영화 전체를 신선하고 청량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깊고 뭉근한 기운이 오래도록 남는다. 글이 그렇다. 우리가 하는 일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순간을, 그리고 나 자신을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신선하고 청량하게 만든다.


그래서 모두 쓰고 있다,면 좋겠다. 약을 쓰며 글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고, 사람이든 글이든 귀하게 잘 썼으면 좋겠다. (대가를 받는) 작품으로서의 글이나 보고서 등 기술적인 글이 아니라면, 잘 쓰고 못 쓴 글은 없다. 다른 글은 있지만 틀린 글은 없다. 만 가지 다른 글이 있는 것이지 오천 가지 맞는 글과 오천 가지 틀린 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눠보자면 좋아하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글을 쓰자. 개인적인 글에 정답은 없으므로 남이 맞다고, 좋다고 '주장하는' 글을 억지로 따라 쓸 필요는 없다. 단문으로 쓰기를 좋아하면 짧게 쓰면 된다. 단문만큼 이해하기 쉽고 깔끔한 글이 없다. 느리고 긴 문장을 좋아하면 길게 쓰면 그만이다. 영화의 롱테이크를 보는 듯 숨죽이고 읽게 된다. 꾸밈없는 담백한 글이 좋으면 그렇게 쓰자. 심심한가 하면서도 뒷맛이 개운해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게 담백한 국, 아니 글이다. 화려하고 장엄하게 쓰고 싶다면 도전해도 좋다. 글을 읽다 전율을 느끼는 순간이 천둥 같은 문장을 마주할 때이다.


내 글이 좋아야 계속 쓴다. 내 글을 좋아하는 마음만큼 이 근사한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도 없다. 그런데 좋아하는 글을 쓰더라도 쓰기 싫을 때가 올 것이다. 그럴 때는? 그냥 안 쓰면 된다. 그러고 있으면 스멀스멀, 쓰고 싶은 건가 지금? 쓰고 싶은 것 같은데 왠지? 쓰고 싶은데? 쓰고 싶잖아? 쓰고 싶어! 하고는 쓰게 된다. 좋아하는 글이라면 안 쓰고는 못 배긴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글이라면 쓰고 싶은 마음이 들기 어려울 것이다. 글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면 좋아하지도 않는 글을 억지로 쓸 필요는 없다. 당연하다, 뭐하러. 남들도 내 글을 좋아해 주면 좋겠는데, 내가 좋아하는 글과 남들이 좋아하는 글은 다르지 않을까? 한다면, 그건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이 또한 내가 좋아하는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좋아하는 글을 남들도 좋아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내 글을 남들이 좋아할 확률은 그보다 훨씬 낮다. 그러니 좋아하는 글을 쓰자. 좋아하는 글만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기껏해야 18,000일 정도 남았으려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없지만, 쉽게 쓰는 사람은 있다. 선천적 재능의 차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후천적 노력으로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글을 '쉽게 쓰는 것'은 방법을 달리 하거나 마음가짐을 고쳐먹으면 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그리 어렵지 않으며 꽤 재미있다는 점이다. 부디 설렁설렁, '게으른 작자(作者)'가 되시기를. 어쨌든 근사한 글쓰기를 포기하지 마시기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SNS가 인생의 낭비인가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