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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챙겨 떠날 것

by 소기

글러브, 책, 그리고 아내



여행 갈 때 빠뜨리지 않는 것이 글러브와 책입니다. 글러브는 아이, 책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아이와 당신을 위한 것은 있으면서 아내를 위한 것은 없잖아 너무하는군, 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글러브는 아이, 책은 나를 위한 것, 그리고 '여행은 아내를 위한 것'입니다! 사실은 전부 다 아내를 위한 것입니다. 전부 다라서 생략한 것뿐입니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야 잘 산다'처럼 잘 살기 위해 중요한 것을 말할 때 굳이 공기를 언급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은 가장 중요하지만 너무 당연한 것이라 말하지 않는 것이지요.


아무튼, 어딜 가든 글러브와 책을 꼭 챙깁니다. 갑자기 캐치볼이 하고 싶은데 글러브가 없으면 큰일입니다. 아이는 그야말로 '갑자기' 캐치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유가 없어요. 뭐 딴에는 이유가 있겠죠. 갑자기 잔디밭이 나타났다거나, 주차장에 차가 없다거나, 운동장 비슷한 곳에 와 버렸다거나, 바다가 보인다거나, 해가 쨍하다거나 갑자기 어두워졌다거나(와 야간 경기야 아빠), 비가 그쳤다거나, 바람이 분다거나, 배가 부르다거나 살짝(쥐똥만큼 고파 아빠) 고프다거나, 새 운동화를 샀다거나 역시 신던 게 편하다거나,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거나 없는 날이거나......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갑자기 캐치볼 하기 좋은 날이다, 뭐 그런 식입니다.


아이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야구를 좋아했나 하면,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 야구장을 데려간 게 작년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잠실구장이었고 롯데와 두산의 경기였으며, 롯데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고통을 대물림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아빠의 로망(아이와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기였습니다. 김원중이 예상외로 호투해서 투수전 양상으로 가던 중에 느닷없이 민병헌이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 홈런볼은 우리 자리에서 정확히 두 줄 앞에 떨어졌고 우리는(함께 갔던 친구 녀석과 그의 아이들)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중계 카메라에 그 장면이 찍혀서 TV에도 나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 아이는 마치 한 마리 학처럼 고고히 '시끄럽구나, 재미없구나, 집에 가고 싶구나' 하며 앉아 '하드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을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야구장을 다녀온 뒤에도 야구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글러브는 쳐다도 보지 않았지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왠지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꼴찌 팀을 응원하며 봄 여름 좋은 계절을 우울하게 보내는 것보다야 낫지, 하며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롯데는 여전히 못했고 저는 여전히 우울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글러브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캐치볼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야구 경기를 보고 하이라이트를 봅니다. 응원가를 듣고 부르고 야구 규칙을 공부합니다. 너튜브에서도 야구 관련 영상을 잔뜩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달라진 점은, 응원하는 팀이 키움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응원하는 팀을 바꾸자고 결심한 날 소주를 참 많이 마셨습니다만, 울지는 않았어요). 어쨌든 매일 야구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비가 오면 좋겠다 하다가도, 캐치볼 못해 속상해할 아이 생각에 날이 맑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기도 합니다. 야구가 왜 좋아? 하면, 그냥! 합니다. 아이가 야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영영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습니다만, 뭐 어떤가 싶습니다.


갑자기 캐치볼을 하고 싶은 것처럼, 갑자기 활자가 '땡길('당길'이라고 하면 '자장면'처럼 느낌이 살지 않습니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책이 없으면 난감합니다. 여행 안내도나 메뉴판을 보기도 하는데 영 재미가 없습니다.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라도 좀 재밌게 쓰면 문제가 되나 싶은 생각이 매번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책을 꼭 챙깁니다. 사실 여행 가서 책을 꺼내 보지도 않고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아내에게, 짐만 되게 뭐하러 가져갔냐 핀잔을 들을 때도 있지요. 그래도 책을 가져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큽니다. 운전할 때 안전벨트를 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정도의 차이랄까요. 꼭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안전벨트를 매면 안심이 됩니다.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지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꺼내 읽지 않더라도 챙겨 가면 안심이 됩니다. 마음 편히 여행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음... 저는 그래요.



이번에는 "100 인생 그림책"을 챙겼습니다. 아내 생일에 카드 대신 준비한 책이었습니다(물론 첫 장에 메모도 했고, 따로 선물도 준비했지요). 한 살부터 백 살까지를 각각 한 컷의 그림과 한 문장으로 표현한 그림책입니다. 래서(아내 생일 기념 여행이고, 그림책이어서)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다 읽었습니다. 덕분에 내내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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