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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그 한 마디

by 소기

작고 흔한 꽃 한 송이가 피겠네.



오래된 잠옷을 꺼내 입었다. 신혼여행 갈 때 선물 받았던 거니까 7년도 넘은 옷이다. 아내는 버려라 버려라 했지만 왠지 그러긴 아쉬워서 깨끗이 빨아 옷장에 넣어 두었었다. 하도 입어서, 오래 걸어둔 커튼처럼 색도 바래고 아늘아늘하지만, 오늘처럼 입고 잘 옷이 없을 때는 "버렸으면 어쩔 뻔했나 몰라" 하고 흐뭇하게 입게 된다. 흰색 바탕에 하늘색 체크무늬가 있는 딱 잠옷 같은 잠옷이다(눈치채셨는지 모르지만 원래 커플 잠옷이었고, 아내의 것에는 분홍색 무늬가 있었다. 진작에 버렸다). 적당히 얇고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촌스럽다. 그야말로 '딱 적당한 잠옷'이라 마음에 든다. 아주 가끔 입긴 해도 입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 평소에는 잠옷을 따로 챙겨 입지 않아서 이것을 입으면 왠지 잘 차려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껏해야 침대로 직행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한 준비를 잘 마쳤다는 생각에 조금 우쭐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주 아끼는 옷이냐면, 그 정도는 아니다. 어느 날(입고 잘 옷이 없는 그런 날) 찾는데 없으면, 아내가 몰래 버렸나 보구나 하고 말 것이다.



어쨌든 적당히 아끼는 그 잠옷을 입고 침실로 가는데 아이가 종종종 오더니,


"아빠 이 옷 오랜만에 입었네."


하고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러 갔다. 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었고 다시 무엇을 계속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말만은 또렷하다. 일곱 살 아이의 말 치고 (톤이나 분위기도) 별로 웃기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요소인 감탄사(부와악! 꽤애액! 흐이익! 등)나 되지도 않는 비유(똥 같은, 방구 맛이 나는, 대머리 같은 등)가 쏙 빠졌다. 누가 들어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음성 변조나 과장된 몸짓도 없었다. 그저 사실에 대해 꾸밈없이 '툭' 말했다. 담백한 그 한 마디에 나는 그만 설레고 말았다. 감동하고 만 것이다. 듣는 순간 차오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거나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툭' 던져진 말이 '툭' 하고 마음 한 구석에 떨어진 게 전부다. 얼마 뒤 그 자리에 아주 작고 흔한 꽃 한 송이가 피었고, 볼 때마다 '예쁘다' 생각했다. 그 마음이 '사랑을 받고 있구나' 확신을 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 혹시 더 필요하신 거라도? 아뇨, 충분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당신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 말하지?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지? 우리는 늘 찾고 있지만, 엉뚱한 데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래 가사, 구글, 인스타그램, 책(손끝으로 원을 그려 봐, 그걸 뺀 만큼 널......), 주변 사람(특히 입사 동기 박 과장)에 있을 리가 없다. '그 사람'에게 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사람을 설레게 하고 마음에 꽃이 피게 할 말은 바로 '그 사람'에게 있다.


그래서 '관찰'해야 한다. 늘 들여다보고 잘 살펴야 한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찰과 관심은 선후 관계라기보다는 상호 촉진적인 관계여서, 관찰하면 관심이 가고 관심을 가져야 관찰하게 된다. 결국 사랑을 말하려면 관심을 기울이고 관찰해야 한다. 그러다 '툭',


작고 흔한 꽃 한 송이가 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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