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책을 쓰고 싶다는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

by 소기

책을 쓰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처음이 아니다. 전부터 막연히, 글 좀 쓴다는 칭찬(이든 빈말이든)이라도 듣는 날엔 노트에 빼곡히 제법 구체적인 얼개를 짜기도 했다. 이미 써 놓은 서문, 작가의 말, 프롤로그, 심지어 소표지 다음에 나오는 '누구누구에게(이를테면, 나의 첫 독자 봄나물 양과 박똥개 군에게)'만 수십 개. 그러나 시도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책을 쓴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책 쓰기를 방해하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1) 언젠가 쓰겠지.

2) 내가 무슨 책을.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이야기다.


언젠가 쓰겠지,는 ‘글 쓰는 능력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쓸 수 있다’와 같이 들린다. 희망을 넘어, 책을 쓸 준비가 다 된 상태라고 보여지기까지 한다. ‘때’만 온다면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냥 안 쓰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핑계다. 언젠가,는 ‘없는 날’이다. 쓰겠지,는 ‘남 일’이다. 쓰면 좋기는 하겠지만 꼭 써야 하는지는 모르겠고 확실한 건 지금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내가 무슨 책을,은 ‘부족하지만 고요히 그러나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을 겸손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어머, 겸손하기까지.’라며 칭찬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 안 쓰겠다는 이야기다. ‘내가, 무슨, 책을?’에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지만 결국, 안 쓴다는 말임에는 다름이 없다.


이렇다 보니 늘 얼개만 짜다 얼어붙고, 녹으면 다시 얼어붙고를 반복하고 있다. 얼개를 짜다 보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건 같은 이야기를 하도 많이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우길 수도 없는 것이, 원래 그랬던 것 같다.


대학 때 희곡을 한 편 써 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마감 일이 코 앞에 닥칠 때까지 무얼 쓸까 이걸 쓸까 저걸 쓸까,만 하다가, 이런 저런 아이디어와 얼개들을 엮어서 옴니버스 액자식 구성 초현실 장르 파괴 신개념 희곡을 국밥마냥 후루룩 말아 제출했다. ‘희곡을 쓰는 시간’이라는 그럴 듯한 제목을 붙여서. ‘아이디어는 좋으나 한 편의 희곡으로 발전시킬 생각이나 노력, 또는 능력 없이 이것 저것 엮어 붙인 잔재주에 불과하다’는 뜨끔한 평도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교수님께서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나가 보라고 하셨다. 물론 안 나갔다. 교수님께 그 말을 듣는 순간, 결심했었다, 절대 안 나가야지.


이야기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나 생각해 보니, 아! 나는 책을 쓰고 싶었다. ‘책을 쓰고 싶다는 책(가제)’을 써 보면 어떨까. 책을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사람이 책 쓰는 과정을 책으로 내는 것이다. 이 컨셉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해 보니 역시나, 여러 번 쓰고 지웠던 주제다. 어쨌든 책을 쓰고 싶다, 나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소기의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