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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골 Feb 03. 2023

차라투스트라

니체 읽기 AZ 0


 니체는 네 가지 복음서를 대신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네 부를 썼다. 신은 죽었기 때문이다. 1883년 1부를 쓰고, 1884년 4부를 완성하여, 1885년 자비롭게 자비로 출판한다.


1.

 차라투스트라는 서른이 되던 해 산 올라 10년 동안 고독의 시간을 보냈다. 상승과 생산의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일어나 태양을 향해 말하길,

“네가 비추어주고 있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태양처럼 스스로 충만한 인간은 넘치는 풍요를 베푼다. 차라투스트라의 내리막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

 차라투스트라는 숲 속에서 성자를 만난다. 성자는 차라투스트라를 알아보고는,

“그대 오늘은 그대의 불덩이를 골짜기 아래로 나르려는가? 불을 지르고 다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벌이 무섭지도 않은가?”

 프로메테우스가 들었을법한 협박과

“저런, 또다시 그대 자신의 몸을 질질 끌고 다니려는가?”

 역경에 대한 경고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을 방해하려 한다.


“나 사람들을 사랑하노라.”

 차라투스라는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에게 선물을 주려한다고 말한다.

 신을 사랑하는 성자는 차라리 그들이 구걸하게 만든 뒤 적선을 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3.

 성자에게서 벗어난 차라투스트라는 첫 도시에 들어서 위버멘쉬(Übermensch) 설파한다.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자신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하는가?”
“사람에게 있어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아닌가. 위버멘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위버멘쉬는 현세태의 인간, 그다음의 인간이다. 선택된 특별한 인간, 마술적 능력을 하사 받은 초월적 인간(超人)이 아니다. 위버멘쉬는 말종의 인간(末人)극복해 낸 리에서 새로 다시 시작하는 인간(初人)이다.


“사람은 더러운 강물이렷다.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을 모두 받아들이려면 사람은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하리라.”
“위버멘쉬야말로 너희의 크나큰 경멸이 가라앉아 사라질 수 있는 그런 바다다.”

 웨버멘쉬는 태초부터 깨끗하고 성스러운 영혼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쉽게 쌓이는 더러움인 신체에 대한 경멸을 경멸하여 소멸시키는 인간이다.


4.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우리에겐 가축 상태에서 벗어날 힘과 위버멘쉬에 다다를 힘이 있다. 그런데 그 힘을 왜 잊고 사는가?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며,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안전제일주의 위험하다. 그것은 자신에게서 자신의 힘을 강탈하는 것, 신체를 경멸하는 자, 타자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법을 잊는 것, 곧 사랑하는 능력을 상실하는 일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어서 몰락을 노래한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다가올 세대를 정당한 것으로 맞이하고 지난날의 세대를 구제해 내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현재를 살고 있는 세대를 위해 파멸하고 하기 때문이다.”

 몰락하는 자는 자신을 완전히 소비한다. 베풀기만 할 뿐, 자신을 보전하려 하지 않는다. 고지에서 기꺼이 내리막을 내달리는 자이다.


5.

 차라투스트라는 군중들에게 말인(末人)을 성토한다.

“슬픈 일이로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 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의 시대가 올 것이니.”

 말인으로 살아간다 인지하지 못하 자기 자신을 제대로 경멸할 줄 모르게 된다. 대신 타인만을 경멸하면서, 말인으로만 살아간다.


“때때로 마시는 얼마간의 독, 그것은 단꿈을 꾸도록 한다. 그리고 끝내 많은 독을 마심으로써 편안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말인은 자그마한 고통에도 진정제를 찾는다. 고통스러운 상태로 있는 것은 죄스럽고, 고통을 이겨내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너무 귀찮은 일이다. 약효가 다하면 다시 진정제를 복용하고, 그것을 반복한다. 끝내 그냥 그렇게 죽는다.


“사람들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자신들의 조촐한 환락을 즐긴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말인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소소한 쾌락은 말인의 미덕이고, 절정의 쾌락은 그들에게 악덕이다.


 군중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어댔고, 광대는 곡예를 시작했다.


6.

 광대는 두 탑을 잇는 줄 위를 걸어간다. 그때 등장한 익살꾼은,

“네가 있을 곳은 저 탑 속이 아니더냐.”

저주를 퍼부으며 재난이 되고, 광대는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죽음이 예고되자 군중은 달아난다.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그들에게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만이 광대의 곁을 지킨다.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다. 너의 영혼은 너의 신체보다 더 빨리 죽어갈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음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7.

 차라투스트라는 광대의 시체 옆에서 생각에 잠긴다.

“섬뜩한 것이 사람이란 존재로 그것에는 아직 아무런 의미도 없구나. 그리하여 익살꾼조차도 그에게는 재난이 되는구나.”

 존재하는 것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존재의 운동이 가치를 생성한다.


 죽은 광대는 차라투스트라의 거울이다. 그의 실패는 위버멘쉬라는 가르침이 군중의 마음에 닿지 않는 이유를 암시하고 있다.


8.

 차라투스트라는 광대를 직접 묻어주기 위해 시체를 등에 지고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익살꾼이 슬며시 다가와 차라투스트라에게 속삭이기를,

“선하다는 자와 의롭다는 자들도 그대를 미워하여 그대를 자신들의 적이자 자기들을 경멸하는 자로 부르고 있소. 참신앙을 갖고 있다는 신앙인들도 그대를 미워하여 대중의 위험이라고 부르고 있고.”

 차라투스트라는 대중에게 위험하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를 비웃어 떠나보내려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차라투스트라는 어두운 길을 더 걷는다.


 끌어내리는 쾌락에 중독되어 언제나 자신들이 파놓은 무덤에 들어갈 희생양을 탐하는 '무던 파는 인부들'과 무엇을 베풀어야 되는지는 알지 못하면서 베풂에만 중독된 노인의 외딴집을 지나 길 끝에 다다른다. 동이 틀 무렵에야 차라투스트라는 광대를 텅 빈 나무속에 눕혔다. 차라투스트라는 회복 위해 잠에 든다.


9.

 차라투스트라는 정오에 눈을 떴다. 정오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크게 웃었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이 아니라 그의 길동무들에게 말하련다! 차라투스트라가 고작 가축의 무리나 돌보는 목자나 개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무리를 지어 '양 가운데 한 마리의 양'이 되려는 자들의 귀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창조하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은 송장이 아니라 길동무다. 짐승의 무리도 신자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더불어 창조할 자,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서판에 써넣을 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들을, 그리고 자신의 낫을 갈 줄 아는 자들을 찾는다.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절멸자, 선과 악을 경멸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리라. 그러나 그런 자들이야말로 추수하는 자요, 축제를 벌이는 자인 것을.”

 여럿 중 하나가 되려는 자, 맹신하길 좋아하는 자는 책을 덮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자는 책장을 넘기라.


10.

 차라투스트라가 10년의 수련에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저 태양 아래서 가장 긍지 높은 짐승과 저 태양 아래서 가장 영리한 짐승이다.”

 곧 독수리와 뱀이다. 망원경처럼 멀리 보는 게 독수리고,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보는 게 뱀이다. 세상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관조하는 힘이고 사물을 톺아보는 힘이다. 둘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근시나 원시가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그의 길동무에게 말한다.

“그러나 나 지금 가능하지 않은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가능한 일은 행하면 된다. 노력하면 되는 일은 소망의 대상이 아니다. 생존과 생식이 생의 유일한 목표라면 가축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내리막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니체는 머리말에서 인간 위상학을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말인의 반대에 초인이 있고 그 사이에 사람이 있다. 이 위상은 고정된 신분계급 같은 게 아니다. 늘 말인이었어서 끝까지 말인인 것도 아니고, 초인의 순간을 경험했다고 해서 말인으로 추락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니체는 말인으로 사는 순간을 경멸하고 초인으로 사는 순간을 도모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신체를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제대로 살라 말하지 오래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 두철수 방송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0.

원제: Also sprach Zarathustra (1885)


방송

김준산 외, 〈니체 강독 1편〉, 《두 남자의 철학 수다》.

https://www.podbbang.com/channels/1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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