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순례길을 걸으며 작성한 일기장을 열어보았어요. 액기스 기록만 가득한 일기장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덧붙여봅니다. 3년만에 만난 또 다른 나
이 날은 힘든 육체와 고독한 마음이 짓눌리고 쌓여온 덕에 폭발해버린 날이 아닐까 싶다. 온 발가락에 테이핑을 하고서 걸었다. 어떤 순간부터는 절뚝이고 있었다. 걸을 때는 느낄 수 없었는데 찍어둔 영상을 보니 절뚝이며 걷는다. 이미 식구 많아진 것 같은데 오늘도 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이 물집들아. 뭔 일이냐 정말. 오늘도 태양에 말라죽은 해바라기들을 보고 나도 죽을 것 같다 태양아 제발 그만해라 외쳐보고 또 큰 그늘 아래서 모든 짐을 다 벗어던지고 가만히 눈을 감아 바람을 느꼈다. 농가를 지날 때 그늘 아래 맥주 박스와 버려진 의자가 쌓여있었다. 농부들에게도 너무나도 소중한 쉼터겠구나. 지금은 제가 잠시 빌려쓰겠습니다. 여느때처럼 극한의 고통과 행복을 오락가락하며 걸었다. 그늘 아래서 조금 쉬고나면 살 것 같다. 그러다 진짜 이러다 죽겠다하는 시점에 큰 나무가 나오거나 사람을 만나게 된다.
농가에서 지날 때 어떤 농부 할아버지가 많이 힘들어보인다고 쉬어가라했다. 나는 오브리가도. 벗 아이 해브 투 고 (그치만 전 가야해요) 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저기 너머 본인 집이라며 자고 가라했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감사해요. 괜찮아요.를 외쳤는데, 자꾸만 여러번 자고 가라고 한다. 영어를 못하셨기에 나는 포르투갈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조금 무서워졌다. 순수한 친절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허허벌판 같은 농장에서 걷는 사람은 또 나혼자고, 아무래도 나는 여자고, 아무래도 나는 여기 이방인이고, 아무래도 나 하나쯤은 없어져도 누구도 모를거고, 아무래도 그 사람은 여기 지리를 잘 알거고 무서운 연결고리를 상상하다 보니 빨리 걸어졌다. 좌,우로 모두 옥수수밭이 펼쳐져있고 차 한대와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흙길이었으니까 내가 숨겨질 수 있는 이 폐쇄적인 공간을 빨리 벗어나야된다고 생각했다. 드넓은 허허벌판이였다면 조금은 덜 무서웠을 것 같다. 시야 확보가 되니까. 그치만 난 지금 옥수수밭에 갇혀버릴 수도 있으니까 얼른 가야해. 빨리 가자. 덕분에 다리가 막 움직여졌다. 그렇게 한참 걸어가다 또 단순한 육체의 지침으로 무서운 상상은 밀려났다. 육체의 고통이 무서운 정신을 이겼다. 축하해 이 물집놈아.
겨우 그늘을 찾아 쉬고있는데 어떤 차가 선다. 순례길 걷는거냐며 물어보고, 피곤해보인다면서 본인이 여기 나가는 것까지만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앞서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미 쫄았기 때문에 이츠 오케이. 오브리가도. 오브리가도. 를 앵무새처럼 외쳤다. 사실 별로 쉬지 못했는데 굉장히 잘 쉰 것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양말과 신발을 차례대로 신고 씩씩한 척 걸어갔다. 남성 운전자는 정말 괜찮냐면서 거듭 물어보고서 천천히 운전하더니 쌩 가버렸다. 막상 쌩-하고 내 눈 앞에서 저만치 멀어지는 차를 보니 탈 걸 그랬나 쩝. 싶기도 했다. 너무나도 빠르게 사라졌으니까. 내가 걸으면 30분은 족히 걸릴텐데. 뭐 그런 생각을 했다.
폐쇄적인 농가를 벗어나 씩씩하게 걸어가다 또 점점 배터리가 닳아갔다. 매일 매일 똑같은 생각을 했다. 솔직히 태양만 없어도 살 것 같다. 아니다 물집만 없어도 진짜 살 것 같다. 아니다 내 짐만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다 그냥 다 아닌 것 같아 으아아아아아ㅏ 다 비켜 다 나와아아아아아 또 내면의 속 시끄러운 분노를 들으며 에너지가 급속도로 떨어져가고 있었다. 포르투갈길 초반에는 마을이 잘 없어 잠시 쉬어갈 곳이 없다. 물을 사먹을 슈퍼나 잠시 앉아있다 갈 카페나 (물론 거리가 멀어서 카페에 앉아갈 여유 따윈 없었겠지만..) 그런 상점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 다만, 길거리의 나무 한 그루, 아까처럼 농부들이 쌓아놓은 박스떼기, 혹시나 도시 같은 마을을 지나게 된다면 벤치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좀비처럼 걸어가고 있는데 슈퍼가 보인다. 내 물은 미지근하고 나는 목이 너무 마른데 시원하게 먹고 싶어서 새로운 물을 사는건 사치니까, 게다가 그렇다고 물을 너무 벌컥벌컥 먹어버리면 화장실도 없으니까 난감해질테니까 그림의 떡처럼 보면서 지나간다. 내 눈빛이 너무 절실했을까.
여행기를 영상으로 보고싶다면 : https://youtube.com/watch?v=Zl6E_hwaI20&feature=shares
일기장 글꼴 출처 : 나눔손글씨 가람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