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한에서 나는 그저 행복한 이방인이었다. 추운데 아무런 난방시설이 없는 방 말고는 거슬릴 게 없었다. 어쩌면 그 덕분에 햇살의 위대함을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라한은 설산에 둘러싸여 있고 근처에 큰 강도 있어서 꽤 추웠다. 더군다나 가장 구석자리였던 내 방 바로 옆에는 작은 폭포가 있었다. 그저 숨을 생각으로 선택한 그 방이 그렇게 추울 줄이야. 이리도 추우니 해가 뜨면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문을 열고 내 전용 테라스(모두의 복도이지만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 거라고 하자)에 앉아서 설산을 비추는 해를 바라보며 아침잠을 깨운다. 햇살의 따스함을 느끼다 보면 배가 고파진다. 부엌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아침을 해 먹는다. 내려가보면 여기서 한 달 이상 장기숙박하는 다른 아저씨가 있고, 아침으로 짜빠띠나 쁘라따를 만드는 주인장 어머니가 있다. 복작복작 가스불 아래서 너무 춥지 않아요? 으으으 추워요오오오 손짓 발짓으로 대화하며 아침을 먹는다. 어머니는 늘 갓 구운 짜빠띠나 쁘라따, 아침식사 준비가 지났을 땐 차라도 끓여서 주곤 하셨다. 어떤 날엔 장기 투숙객인 아저씨랑 요리를 하고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고, 어떤 날엔 주인장인 쏨과 같이 먹기도 했다. 배고프면 먹고, 지루해지면 산책하러 나가고, 다녀오면 따듯한 가족이 반겨주는 집이 생겼다.
아침거리가 없을 땐 시장으로 걸어가 장을 보곤 했다. 도착한 날에 이틀만 있을 거라 생각하고 뭐든지 조금만 샀던지라 그 이후 시장 가는 일은 잦았다. 집에서 나와 설산을 보며 차를 마시고 영상 편집을 했다. 업로드를 위해 쏨과 쏨 친구들에게 핫스팟을 빌린 날, 1박을 연장했다. 게스트하우스에는 와이파이가 없고, 데이터를 쓸려면 마을에 하나뿐인 사이버 카페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귀여워서 떠날 수 없었다. 그런 하찮은 이유를 대서라도 여기에 더 머무르고 싶었다. 해가 지고 나면 방은 더 추워져서 로비로 달려갔다. 거기엔 작은 전기히터가 있었고 매일 리셉션을 지키다 보면 쏨의 다양한 친구들이 오갔다.
어떤 날에는 나이차이가 곱절 이상 나는 것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오고, 또 다른 날에는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친구들이 오고, 또 어떤 때에는 큰 형 같은 사람들이 왔다. 누가 오던 그들은 거기서 시시덕거리며 실없는 소리를 하고 담배를 태워댔다. 쏨의 아지트를 즐기면서 2박을 연장했다. 시장을 돌아다니다 뜨개질 공방을 발견했다. 거기서 뜨개질 실과 바늘을 사고 주인장에게 대바늘 하는 방법을 배웠다. 너무 어려워 풀고 묻기를 반복했다. 그날은 추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공방에서 코너를 돌아 위치한 곳에서 옷을 산 날이기도 하다. 옷집 사장은 쏨의 친구였다. 옷집은 사원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깔아 둔 평상에 앉아 가만히 사원과 사원 뒤로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있으면 상쾌하게 숨이 쉬어지는 공간이었다.
평상에서 뜨개질을 하다 모르겠으면 다시 코너를 돌아 공방으로 달려갔다. 그럼 주인장이 내가 해놓은 걸 미안해하며 다 풀었고 다시 차근차근 알려줬다. 교육받고 다시 옷 집으로 돌아가서 뜨개질을 했다. 왔다 갔다 하며 제대로 만든 건 없고 촉감놀이 마냥 풀고 새로 실을 연결하며 한낮을 보냈다. 그러다 배가 고파져 옷 집 평상에 던져둔 가방을 챙겨 밥을 먹으러 갔다. 바코라, 젤라비, 짜이를 하나씩 시켜두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먹는데 옆 테이블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러 번 시선 끝에 그들은 내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본인들도 이곳에 놀러 온 관광객이었다. 인도인 가족과 몇 번의 대화를 오가며 밥을 다 먹었다. 그들은 기념사진을 찍자며 돌아가며 나와 독사진 한 컷, 몇몇의 커플과 나와 한 컷, 마지막으로 다 같이 한 컷을 찍었다. 사진 촬영 끝에 그들은 같이 놀러 가자 했고, 나는 그들의 지대한 관심이 부담스러워 할 일이 있다며 둘러대고선 마을 초입까지 같이 걸어가자고 했다.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열었는데 이상했다. 1,000루피 정도가 쏙 사라졌다. 이상하다? 잘 못 봤나? 뜨개질하다 눈이 맛탱이갔나 싶어 바깥으로 산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지갑을 봤다. 이상하다? 눈을 비볐다. 눈을 오래 감았다 다시 떠봤다. 이상하다? 뭘 해도 내 돈은 없었다. 키와 영수증 다른 카드는 다 있었는데 한화 17,000원에 달하는 현금 500루피 2장만 없어졌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여긴 내가 정한 환상의 마을 사라한인데.... 누가 훔쳐간 거지... 말이 안 되는데... 이 작은 마을에서 누가 내 지갑에 손댄 거야.. 아닌데... 그럴 사람 없는데 이 마을에는.. 충격을 받은 와중에 옆에서 가족이 기다리니 atm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덜덜 떨며 음식점 주인에게 atm 어딨는지 물어봤고 그걸 본 가족들이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어봤다. 돈을 도둑맞은걸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그들은 ‘돈 워리 코이띠까네이’를 외치며 내가 먹은 음식을 대신 계산해 줬다.
같이 걸어가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애써 대답하고 웃었다. 내 머릿속은 도대체, 누가, 왜라는 이 3가지 단어에 갇혀있었다. 옷집에 도착해서 아쉬워하는 가족들과 헤어지고 옷 집주인에게 말했다. 누군가가 내 돈을 훔쳐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느냐. 옷 집주인은 미안한데 여기 CCTV가 없다며, 자기 집에서 이런 적 처음이라며 바로 옆 상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다른 상인과 그는 주머니나 다른 곳에 없냐며 계속 물었고, 나는 없다고 얼빠진 표정으로 답했다. 사실 지갑은 스스로 챙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한심함과 믿었던 마을에게 당한 배신감으로 눈물이 고였다. 울지 않으려 했다. 내 실수니까.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옷 집주인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쏨에게 전화해 일어난 일을 얘기해 줬다. 나에게 돈워리, 돈워리. 아엠쏘리라 외치며 자기가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내 잘못이니까 너는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혼란을 줘서 미안하다고. 애써줘서 고맙다 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로비에 가니 쏨이 괜찮냐고 물어봤다. 자기 친구가 본인에게 연락해서 내용을 안다고 했다. 나는 쏨에게 같이 술을 사러 가달라고 얘기했고, 마을에서 유일하게 술을 살 수 있는 곳으로 함께 갔다. 럼을 사러 가면서 여권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카드를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고액 장비인 고프로를 도둑맞은 것도 아니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래 천 루피면 이만 원도 안 되는 돈인데, 소액으로 경각심을 가지게 된 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면서도 계속 배신감과 분노에 휘말렸다. 내 잘못 맞는데 아는데 자꾸만 도대체, 누가, 왜 이 연결고리에 갇혔다. 나의 환상의 마을 사라한은 그럴 리 없는데 믿기지 않았다. 내일이면 떠나려고 했는데, 이런 마음으로 사라한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2박을 연장하기로 결심했다.
쏨이랑 럼을 사 와서 혼자 한 잔 홀짝였다. 2박 연장의 소식과 그 이유를 알려줬고, 쏨은 코이띠까네이(문제없지~ 노 프라블럼이라는 의미다)를 외치면서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집 갈 건데 같이 갈거냐며 역질문을 했다. 집에 있으면 계속 도대체, 누가, 왜 연결고리에 갇힐 것 같아 좋아! 를 외치며 따라나섰다. 친구 집은 우리가 머무는 동네에서 조금 더 위쪽이었다. 쏨의 차를 타고 가는데 때마침 노을이 예쁘게 지고 있었다. 내 마음을 알아챈 쏨이 사진 찍고 싶으면 찍으라며 차를 세워줬다. 내려서 매일 즐겼던 설산에 노을을 곁들이다 보니 오늘이 생각나지 않았다. 따라간 집에는 친구랑, 어머니, 아버지가 같이 계셨다. 친구 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창 밖을 봤다. 또 다른 설산 뷰에 훨씬 조용한 마을이었다. 이게 호텔이나 호스텔이 아니라 그냥 동네친구의 방이라니. 나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올게. 하는데 그게 설산뷰에 고요한 밤이라니. 경이롭다고 생각할 때쯤 친구 어머니가 비스킷과 커피를 갖다 주셨고 언어라는 장벽으로 깊은 대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따듯한 눈빛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가 나가시자 쏨과 친구인 비백은 커튼을 치고, 문을 잠그고 몰래 담배를 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청소년기 애들을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나는 애들을 마구마구 놀려댔다.
“야, 너네가 몇 살인데 아직도 이렇게 숨어서 담배피냐. 10대야 뭐야 ㅋㅋㅋ”
- 아니 나도 그러고 싶은데. 엄마 알면 나 죽일 거야ㅋㅋㅋ
시시덕거리다 그 친구들은 한국 사람들은 다 너랑 비슷하냐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니 너처럼 자유롭게 여행하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냐고 내용을 바꾸었다. 나는 사람마다 다 다른 거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너무 무성의하게 말한 것 같아서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본인이 원하는 가치를 많이 쫓는 것 같다고 보탰다. 나는 어쩌면 한국사람들의 대표적인 이미지와 많이 다를 수 있다고. 내 친구들은 이렇게 길게 여행을 잘 안 하는데, 나는 이렇게 길게 여행하는 걸 너무 좋아하는 편이라고. 그렇게 치면 나라는 사람으로 한국 이미지를 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적당히 발을 빼며 대답했다. 우린 연애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결혼이라는 주제로 넘어갔다. 그들에게 결혼 적령기와 언제 결혼하고 싶은지 물었다. 비백과 쏨은 보통 28살 정도면 결혼하는 편인 것 같고, 본인들은 자유롭게 여행하고, 경험을 최대한 많이 하고서 결혼하고 싶다며 아직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들의 나이는 22살 정도였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여기에서 32살 여성이라면 대부분 누군가의 엄마라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자유롭고 쿨하고 힙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난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애써 증명하기 위해 한국에서는 요즘 여성기준 30대 중반즈음이면 결혼을 많이 하는 것 같고, 사실 결혼 적령기라는 게 많이 늦쳐줬다가 사라진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비혼을 원하는 사람도 많아진 것 같다며 내가 특별하고 힙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돌려 말했다.
다음 주제는 델리였다. 델리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이 친구들은 델리에 가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됐다. 본인들이 알고 있는 델리에 대한 에피소드를 풀어주며 이게 사실이냐고 내게 물었다.
“ 예전에 어떤 사람이 델리에 차를 사러 가서 상점 앞에 오토바이를 주차했어. 아내가 오토바이랑 같이 밖에서 기다리고, 남자는 상점에 가서 견적을 보고 차를 결제하고 나왔는데, 오토바이는 사라지고 아내는 피범벅이 되어서 쓰러져있었대. 근데 본인이 차를 사고 나오는 시간이 꽤 걸렸는데, 아내가 그렇게 피범벅으로 죽어갈 때까지 지나가는 사람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거야. 이게 말이 돼? 여기였으면 너도나도 나서서 병원 부르고, 상황 파악을 했을 텐데. 무섭고 끔찍해. 델리는 진짜 그런 곳이야? 어때?”
델리 괴담을 듣자 나도 델리가 무서워졌다. 델리가 보여주는 단편적인 이미지는 우리가 예전에 서울을 대하는 내용과 비슷했다. 서울 가면 뒤로 넘어져도 코 깨지고, 서울 사람들은 코 베가니까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말들. 시골 사람들에게 도시는 사람답게 살 수 없는 무서운 곳이었다. 반면에 사라한이라는 마을에 대한 애정과 더 나아가 사라한 이 있는 히마찰이라는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 느껴졌다. 히마찰은 대구, 서울, 광주처럼 한 지역이고 인도 북부에 위치해 있다. 히마찰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 친절하고, 잘 도와주고, 깨끗한 공기와 자연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 살 생각은 해본 적이 없고, 평생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가고 싶어 했던 구글맵의 별표 지역은 다 히마찰이었다. 나는 살면서 내가 머문 지역에 대해 여기 진짜 최고야. 너 이만한데 못 만날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서 지낼 땐 사람 많고 복잡한 길거리를 불평했고, 대구에서 지낼 때는 변화없고 정체된 느낌을 불평했다. 어디에서 지내든 여기는 이래서 좋고, 그래서 여기만 한데 없을걸?이라고 애정을 느낀 적이 딱히 없었다. 남에게 당당하게 동네사랑을 외칠 수 있는 이들이 멋있었다.
시간이 꽤 지나 다음에 또 보자며 인사하고 나왔다. 차를 타고 가려는데 위에서 비백이 줄리엣처럼 창문사이로 손을 흔들어줬다. 아, 이런 감성이 너무 좋아서 내 마음대로 또 놀러 와야지 생각했다. 쏨에게 덕분에 즐거운 기억으로 잘 수 있다고, 도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쏨은 나중에 또 가고 싶으면 가자며 굿나잇으로 대답했다. 지루한 일상으로 가득 찰 줄 알았던 사라한 여행은 생각보다 드라마틱했다. 오히려 좋아, 역시 2박 연장하길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