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다정한 봄날

익숙한 이름과 낯선 이름 사이

by 두부

3화.


윤기는 생각보다 훨씬 말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귀찮지도, 시끄럽지도 않았다.

말끝마다 작은 감탄사를 덧붙이며,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말을 걸었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신 뒤에도

그는 나를 향해 속삭이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디에 사는지,

어느 중학교를 나왔는지,

심지어 가족 관계와 미래의 꿈까지—

처음 만난 나에게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그의 이야기는, 마치 잔잔한 오후를 채우는 바람결 같았다.


“그래서 어디 산다고?”


이제 자기 얘기는 다 했다는 듯 윤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에 대해 물었다.


“응, 무운동.”

“무운동? 진짜 처음 들어봐. 신기하다!”


말끝에 웃음이 묻었다.

꼬마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성큼 들이대 연신 질문을 쏟아냈다.

그 모습에 난 문득 웃음이 났다.


“서울 북쪽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야.

'무운', 말 그대로 구름이 없는 동네.

하늘이 자주 맑고, 밤이면 별이 잘 보여.

아마 주변에 높은 산이 없고, 바람이 자주 불어서 그런가 봐.”


말하면서, 나조차도 몰랐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음 어딘가에 간직했던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처럼.

방금까지는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재잘대고 있었다.


윤기는 내 말 한마디 한마디 모두를 깊이 새겨들으려는 듯

몸을 나에게 기울이며 눈을 마주치고 귀 기울였다.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다.

문득, 마음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데가 있었구나. 정말 신기해.

난 멀리 돌아다니지 않아 봤거든.

나도 놀러 가서 별을 보고 싶어.”


날 깊게 바라보는 윤기의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나도 그의 눈동자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항상 내가 말이 없는 아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말이 없었던 게 아니라, 말을 건네줄 사람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시간은 금세 흘러가, 어느새 하교할 시간이 되었다.


“나도 언제 무운동에 놀러 갈래.”


오늘 처음 본 사이임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했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자, 내 안의 경계가 스르륵 풀렸다.


“응, 언제든지.”


그는 휴대폰을 꺼내 내 번호를 저장하더니,

교실을 나서기 전까지 몇 번이나 확인하며 웃었다.


“약속한 거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내일은… 같이 가자.”


말한 뒤, 윤기는 잠깐 내 눈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그러자.”


그제야 윤기는 안심한 듯 작게 숨을 내쉬고 교실을 나섰다.

그 순간까지, 난 오늘 하루를 이현 없이 보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이현이 다시 떠오른 건—

교문 앞, 늘 그렇듯 묵묵히 나를 기다리던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단오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말투.

그 안에 스며든, 익숙하지 않은 온도가 나를 흔들었다.


조용한 게 편하다고 믿어왔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오늘 어땠어?”

“정신없었어.”


짧은 대화 뒤, 우리는 나란히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말없이.

그러나 그 고요함 안에,

하루 동안 차곡차곡 쌓인 마음의 파편들이 소리 없이 부딪히고 있었다.


내 어깨에 앉은 두 감정.

한쪽은 가볍고, 따뜻했다.

다른 한쪽은 무겁고, 익숙했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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