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침묵, 그날의 첫걸음
방학 내내, 마주칠 듯 말 듯—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이상하게 이현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손에 핸드폰을 쥔 채, 메시지를 쓰다 지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입학식에 같이 가자던 말, 분명 진심이었을 텐데.
연락 한번 없는 그에게 서운해졌다가,
또 괜히 멍해지기를 반복한 며칠이었다.
내가 먼저 연락할 수도 있었겠지만,
동짓날 이후로는 나도 모르게 마음 한켠이 잠잠해졌다.
섣불리 손 내밀면, 그날의 온기를 흘려보내게 될까 봐.
그건 눈치라기보다는…
날아갈까 봐 가둬버린 마음이었다.
그렇게, 입학식 아침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새 교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생각보다 품이 크다.
할머니가 “크게 맞춰야 오래 입지” 하며 사주신 교복.
이젠 다 큰 것 같은데, 할머니에겐 여전히 나는 아기인가 보다.
옷깃을 고르고, 할머니가 챙겨주신 노리개를 가방에 달았다.
매무새를 단정히 여미고,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담벼락에 기대선 이현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에
섭섭한 마음보다 먼저 안도감이 밀려왔다.
숨기고 눌러두었던 감정이 올라오려는 찰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갈까?”
우리가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는
무운동에서 다섯 정거장 떨어진, 제법 이름 있는 사립고였다.
이현이 오래전부터 가고 싶다던 학교.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같이 지원했다.
그리고 다행히— 나란히 합격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하자,
무운동 친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같이 가네.”
“역시 둘은 떨어지질 않아.”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라.”
이 마을 사람들은 다 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함께였다는 걸.
‘정혼자’라는 말도, 여기선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저 짧은 눈인사로 마음을 건넨다.
이현의 옆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서 있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버스가 도착하자, 약속처럼 우리는 함께 뒷자리에 앉았다.
창밖엔 아직 시린 하늘과 희미한 햇살이 번지고 있었다.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들어서는 기분.
몸보다 마음이 더 긴장되는 아침이었다.
“이현아…”
“응.”
“나… 좀 떨려.”
“… 괜찮을 거야.”
짧은 대화였지만,
그보다 더 많은 말이 손끝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
그 거리 안에 머무는 감정들이 말을 대신했다.
입학식장에 도착하자, 우리는 서로 다른 반으로 향했다.
같은 학교에 배정되었지만,
반까지 함께 되는 행운은 없었다.
입학식 때, 우린 정반대 끝에 서게 되었다.
교장 선생님의 인사, 교감 선생님의 학교 소개가 이어졌다.
“1학년 입학시험 1등, 1학년 1반 윤이현 학생의 시상이 있겠습니다.”
뜻밖의 발표였다.
이현은 중학교 때도 전교 1등이었지만,
이 학교에서도 여전히, 그는 앞에 서 있었다.
날고 긴다는 아이들이 모인 이곳에서조차.
앞줄에 서 있던 여학생들이 소곤거렸다.
“오, 전교 1등이래.”
“윤이현이라니… 이름도, 얼굴도 멋있다.”
그 말에 문득 숨이 멎는 듯했다.
여기선 아무도, 우리 사이를 모른다.
상장을 받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이현을 바라보다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기 시작했다.
질투였을까?
이현에 비해 존재감 없는 나.
그래서 내가 초라해 보였던 걸까?
아니면—
내 정혼자에게 쏠리는, 모르는 이들의 시선.
그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학식이 끝난 후, 나는 배정된 교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1학년 7반.
손끝에 힘을 잔뜩 주고 소리 없이 문을 밀었다.
처음 보는 교실, 처음 마주한 얼굴들.
익숙한 이 하나 없는 공간에 발을 들이자,
가슴이 알 수 없는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웅성이고 있었다.
나는 눈에 띄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가,
교실 뒤쪽 문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저 스쳐 지나가듯 머무르고 싶었다.
그런데—
드르륵, 쾅!
고요함을 깨는 소리가 단번에 교실을 가로질렀다.
헝클어진 머리, 해사하게 웃는 얼굴.
큰 키에 어딘가 자유로운 몸짓이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그는 문가에 앉은 나를 보며 갑자기 물었다.
“성단오?”
… 아는 애였던가?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소년은 자기 명찰을 톡톡 치며 웃었다.
“명찰, 명찰 있잖아.
이름이 예쁘다.
단오라니, 뭔가… 소설 속 주인공 이름 같다.”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이름이 예쁘다는 말은 가끔 들었지만,
이렇게 처음 보는 누군가의 입에서 툭 튀어나오면—
어쩐지 간지럽게 다가왔다.
그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나는 배윤기.
너랑 나, 오늘부터 같은 드라마 주인공이네?”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건네는 인사.
그 말투에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어색하고 긴장이 가득한 교실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져서—
배시시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