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워야 하지만 너무 먼 너
서울 북쪽 끝, 무운동.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그 마을엔,
이른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찬 공기 속으로 흩어지며 거리를 하얗게 감쌌다.
‘무운(無雲)’이라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게,
구름이 낮게 드리운 동짓날 아침이면
온 동네엔 팥죽 냄새가 그득했다.
서늘한 창 너머로 퍼지는 냄새에
나는 잠시 손을 멈췄다.
“좀 더 고아질 때까지 저어야지, 단오야.”
“이제 다 된 것 같은데.”
“팥은 푹 퍼질 때까지 오래 끓여야 해. 그래야 제맛이 나지.”
할머니의 말에 다시 큰 솥 안의 팥을
나무 주걱으로 천천히 저었다.
은근히 시간도 오래 걸리고, 손도 많이 가는 작업이다.
하지만 매년 이맘때면, 우리는 이 팥죽에
한 해의 액운을 담아 끓였다.
떫은맛과 함께, 쓰디쓴 기억도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새알심도 넣어야지. 나이만큼 넣는 건… 이제 좀 많겠다. 그치, 할머니?”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조청을 한 숟갈 떠넣었다.
“올해는 더 달게 해보자. 복도 좀 달라붙으라고.”
늘 그렇듯, 팥죽은 정갈한 도자기 그릇에 담겼다.
작은 광목 보자기로 단정히 싸 마무리한 뒤,
내 손에 조심스레 쥐여 주셨다.
“단오야, 이제 가져가.
매듭 꼭 잡고.
그 집 부모님께도 인사드리고.”
보자기를 받아 드는 순간,
손끝이 묘하게 무거워졌다.
익숙한 의례 같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늘 긴장된다.
장갑과 귀도리를 챙겨 끼고 집을 나섰다.
오전 7시 40분경, 동짓날 해가 막 고개를 들던 무운동의 하늘은
옅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겨울 햇살이 비치는 완만한 오르막길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뿐히 눈길을 밟아 걸었다.
저 멀리, 해마다 팥죽을 들고 찾던 기와집이 보인다.
그 집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살짝 대문을 열었다.
동짓날 아침이면 내가 오는 걸 아시기에
오늘도 걸쇠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
정적이 흐르는 마당을 지나
나는 안채 쪽으로 살포시 발을 디뎠다.
그 순간—
사각.
문 여닫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왔어?”
마루 끝에 선 그는
차가운 입김을 뿜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툭’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어느새 껑충 커버린 키에
그의 방문이 작아 보일 지경이었다.
항상 그대로인 줄 알았던 얼굴도
요즘은 한층 또렷해졌다.
이젠 눈을 마주 보려면
고개를 치켜올려야 한다.
“동지잖아. 어머니, 아버지도 뵙고 갈게.”
내가 내민 보자기를 말없이 받아 들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채로 향하려던 찰나—
그의 손이 불쑥,
내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쪽 말고. 엄마 아빠, 너 올 줄 알고 사랑채에 나와 계셔.”
하지만 말하는 사이,
그 손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이내, 불현듯 손을 놓았다.
어릴 적엔 아무렇지 않던 손길이
지금은 어딘가 조심스럽고 낯설다.
그 짧은 순간,
우리 사이엔 ‘남녀’라는 말이
처음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맞잡았던 내 손에 남은
그의 온기에 괜히 마음이 화끈거렸다.
어릴 적부터 늘 함께였는데,
언제부턴가 ‘정혼자’라는 이름이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웃는 것도,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서로 결혼할 거라는 말을
당연하게 들으며 자랐다.
두 살, 세 살, 네 살…
언제든 말끝마다
“우리 나중에 결혼하잖아.”
아무렇지 않게 약속했고,
그게 아주 자연스러웠다.
정말 그랬다.
“넌 나랑 결혼할 거래.”
“응, 나도 알아.”
“나는 너랑만 결혼해야 돼.”
“꼭 그러자. 나도 너랑만 결혼할 거야.”
그땐 ‘결혼’이라는 말이
뒷산에서 도깨비불 찾기처럼
가볍고 웃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말하지 않아도,
그 단어 안에 담긴 무게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 무게는
우리 사이에 말 없는 틈을 만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우리 사이를 맴돌아
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이현아, 다음 주부터 방학이잖아. 뭐 할까?”
그는 말을 고르듯 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입학식 날… 같이 갈래?”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말수가 적은 그 아이의 눈동자엔
민망함인지, 설렘일지 모를 기색이 어렸다.
방학을 묻자,
입학식을 꺼낸 그의 머뭇거리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왔다.
실없는 말 하나 잘 못 하던 그가
그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곱씹고 되뇌었을지—
그건 인사처럼 건네는 말도,
의미 없이 흘려보낼 말도 아니었다는 걸
나도 모르게 느꼈다.
“…응.”
짧게 대답하고 말았지만,
입김 속에 섞인 내 목소리는
어쩐지 떨리고 있었다.
겨울 하늘처럼,
그 애의 눈동자도
조금은 맑고, 조금은 흐렸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을 따라가느라
내 마음도 한동안, 그 안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