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듯, 닿은 순간

그 한마디 전, 마음이 먼저 다가갔다.

by 두부

4화


“할머니, 나 가요.”

익숙한 아침 인사를 남기고, 대문을 닫았다.

그 앞에는 여전히 이현이 서 있었다.

나와 시선이 닿자,

나지막이 웃으며 먼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다, 오늘따라 어쩐지 심통이 났다.

종종걸음으로 그를 추월해 앞장서 걸었다.

정류장에 도착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에 올라 평소와 달리,

앞쪽의 혼자 앉는 자리에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곤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다.


이현은 그런 내 옆에 조용히 서서,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괜스레 더 뾰로통해져서

그 손을 밀어냈다.

“피곤해”

그게 마지막이었다.

일부러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자연스럽게 윤기의 자리를 찾았다.

이미 담임 선생님은 와 있었지만,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침 조회가 끝나갈 무렵,

선생님의 목소리가 묻힐 만큼

문이 쾅 열렸다.


헐레벌떡 들어온 윤기가 교실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짧은 정적 뒤에,

아이들이 동시에 웃기 시작했다.


“용케 조회 끝나기 전엔 왔네.

빨리빨리 다녀, 늦지 않게!

오늘 조회 끝.”


윤기는 숨을 몰아 쉬다,

나를 보고 찡긋 웃었다.



나는 하루 종일 생각했다.

윤기가 오늘 우리 동네에 놀러 가자고 하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어디를 데리고 가면 좋을지.


하지만 하루가 끝날 때까지

윤기는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약속을 잊은 듯한 태도에

서운함이 스치고,

지나가듯, 흘려 한 말에

혼자 의미를 부여한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며칠이 흐르며,

반 분위기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 어느 날,

3교시 미술 시간이었다.


미술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윤기가 어느새 내 옆에 와 있었다.


여느 때처럼 화사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농담을 늘어놓았다.

어제 본 영상 속 챌린지 춤을 흉내 내며

혼자 들썩이기도 했다.


그 우스꽝스러운 동작에,

웃을 생각도 없었는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너무 큰 소리에

얼른 입을 가렸다.

그러자 윤기가 더 크게 웃었고,

그런 그를 보며 나도 같이 한참을 웃었다.



종소리와 함께, 안경을 쓴 젊은 남자 선생님이 들어왔다.


깔끔한 옷차림, 단정하고 멀끔한 인상에

반에서 가장 활발한 여자 무리에서는

작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선생님은 그 무리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수업을 시작했다.


윤기가 내게 속삭였다.

“인기 많을 거 같아, 그렇지?”

나는 작게 웃으며 살짝 끄덕였다.


“오늘은 수업 대신,

제 소개랑, 한 학기 동안 뭘 할지 얘기해보려 해요.

그리고 그전에,
이번 학기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를 먼저 알려줄게요.”


선생님의 나긋나긋한 말투에

웅성거리던 교실이 차분해졌다.


“이번 과제는 학기 평가에서 무려 그 비중이 절반이나 된답니다.

혼자 해도 되고, 팀으로 해도 괜찮아요.”


칠판에 단정한 글씨로 과제를 적었다.


‘나의 동네, 숨겨진 명소’


“정해진 형식은 없어요.

수채화, 어반 스케치, 포스터…

어떤 방식도 좋아요.

다만 그곳이 왜 ‘숨겨진 명소’인지,

그 이유만은 꼭 담아주세요.

여러분만의 이야기로요.


물론 그림만 내는 게 아니겠죠?

그림을 설명하는 글을 아주 길게, 정성껏 작성하긴 해야죠.”


선생님이 말을 끝내자마자,

반 전체에서

“아아아아-” 하고 탄식 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 속에서 윤기가 몸을 돌려,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성단오! 이건 무조건 무운동이야.

딱 거기에 어울리는 주제잖아.”


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심장이 순간 덜컥했지만,

아닌 척 웃고 넘겼다.


윤기는 잠시 눈길을 머물다가,

시선을 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같이 하면 재미있겠다”


분명 들렸지만, 왠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며 선생님이 말했다.


“최대한 빨리 주제를 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작업이니까요.


혼자 할 친구, 팀별로 할 친구…

모두 반장에게 알려 주세요.

반장은 정리해서 저한테 제출해 주시고요.”


미술실 문이 열리자,

여럿이 짝을 지어 복도에 쏟아졌다.

누군가는 팔짱을 끼고, 누군가는 장난을 치며 걸었다.

들뜬 목소리들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배윤기!”


점심시간마다 윤기와 축구를 하던 애들이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이 윤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우리, 이렇게 팀 어때? 딱이잖아.”

그러곤 옆에 선 애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잰걸음으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아, 미안.

나 단오랑 할 거라서.”


그 말에 장난스레 야유를 보내곤,

모두들 교실로 달려갔다.


나는 앞서 걷다 멈춰 서서

윤기를 돌아봤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우물거렸다.


“알아, 아직 정하지 않은 거...

근데 난 너랑…”

“같이 하자.”


끝까지 듣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그러나 윤기는 환하게 웃어만 줬다.

그 새파란 웃음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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