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광귀의 의뢰 (2) – 붉어진 눈동자
무겁고 텅 빈 침묵이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요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심장이 내려앉고, 숨이 막혔다.
그는 겨우 한숨 내뱉고 입을 열었다.
“야광 님… 그동안 많이 힘드셨죠?
제가 뭐라 해도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띠링—
장승 대감이 어깨로 문을 밀며 들어왔다.
옆구리엔 바둑판, 양손엔 바둑통이 들려 있었다.
“요한아, 바쁘냐…?”
그는 야광귀를 보곤 흠칫 놀라며
눈을 찌푸렸다.
요한은 얼른 일어나
장승 대감의 바둑판과 바둑통을 받아 들었다.
“네, 아저씨. 지금 의뢰 중이라...
이건 여기 뒀다가, 끝나고 같이 둬요.
“알았다, 난 이만 가마.”
그러더니 구석에 바둑판을 내려놓는 요한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신발 조심하고… 다 방안에 두고 문을 잠가.”
그 말 때문인지, 야광귀의 몸이 다시 반짝였다.
요한은 당황해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저분은 그런 야광귀가 아니세요!”
하지만 장승 대감은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한 얼굴로 문을 나섰다.
요한은 부리나케 야광귀 앞으로 달려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연달아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야광은 입술 끝을 간신히 끌어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다들 요한 씨를 무척 아끼나 봐요.”
“아, 그렇게 넘어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한은 얼굴이 빨개져선 자리에 앉았다.
“그럼... 아까 말씀하셨던 거,
괜찮으시다면… 이어서 해도 될까요?
방금 떠올리셨던 그 기억들—
그 단서들 우리에게 매우 긍정적이에요.
혹시, 그 건물… 기억나시나요?
어디였는지만 알아도
훨씬 수월해질 수 있어요.”
“아마… 종로 3가였던 것 같아요.
영어 학원 건물이었는데…
이름은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요.”
“그거면 충분해요!
일단, 여기 앉아서 잠깐만 쉬세요.”
요한은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검색창에 단어를 빠르게 입력했다.
‘종로 3가 영어학원 살인’
오래된 뉴스 포털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검색 결과는 허망할 정도로 깨끗했다.
살인 사건이라면 분명히 기록이 남아 있을 텐데…
‘설마… 자살로 기록된 건가?’
이번엔 키워드를 바꿨다.
‘종로 3가 영어학원 자살’
역시나 관련된 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역시 귀신의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은 건가…’
요한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털을 벗어나 블로그, 네이버 카페, 디시, 옛날 후기들까지
온갖 기록을 샅샅이 뒤졌다.
‘종로 3가 영어학원 투신’
‘추락사’
‘목격담’
‘수강 후기’…
그리고 마침내,
오래된 다음 카페 ‘토익 뿌개기’에서
2008년에 작성된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_님, 나이스 영어학원 절대 가지 마셈.
전에 거기서 어떤 여학생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음.
공부 스트레스 엄청 심했나 봄…
암튼 분위기 이상하고 터 안 좋다는 말 많음.
↳ 무섭다… 나도 거기 다녔는데 분위기 쎄했음;;
↳ 레알 귀신 봤다는 얘기 많았음
↳ 내 친구도 수업 중에 귀신 봤대
요한은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수많은 창과 글귀를 지나쳤지만,
이번만큼은 확신이 들었다.
“찾았다.”
요한은 ‘나이스 영어학원’에 관한 오래된 글 속에서
주소를 확인한 후,
곧장 몸을 일으켰다.
“야광 님, 같이 가실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고모가 옆에 나타났다.
표정은 어딘가 일그러져 있었고,
빛이 없는 눈동자에는 걱정이 스쳤다.
요한은 오히려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고모, 걱정하지 마.
금방 갔다 올게.”
종로 3가.
과거 학원 자리는
술집과 음식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시간은 잔혹할 만큼 모든 걸 삼켜버리고,
남은 건 붉은 네온 불빛뿐이었다.
“야광 님 눈에는
아마 그 시절 그대로 보일 거예요.
귀신은 보고 싶은 것만 보거든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 시절 건물이라니요?”
“지금 보이시는 대로,
설명해 주시겠어요?”
야광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훑어보며 살피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여기, ‘나이스 영어학원’이네요.
4층 전체를 쓰고 있고,
토익이랑 토플 전문.
네, 맞아요. 제가 다니던 학원이에요.
그때 인기 많았는데…
지금도 학생들이 꽤 있네요.”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옥상으로 가보죠.
그때의 장면을 볼 수 있다면,
단서를 찾을지도 모르니까요.”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자,
눈앞에 펼쳐진 건—
감성적인 루프탑 카페였다.
그가 기대했던 낡은 흔적은 사라지고,
세련된 공간에 부드러운 조명과 잔잔한 음악,
향긋한 커피 내음이 가득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이곳이,
한때 비극의 현장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요한은 커피를 주문하고,
야광과 마주 앉았다.
“자, 지금은…
뭐가 보이세요?”
야광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쟤… 아직도 있네.”
“네? 누구 말씀하시는 거죠?”
야광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저 죽인 애요.
저기… 지금, 앉아 있잖아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카페 사장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요한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죽일 사람은 아닌데…’
악인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저 사람이 맞나요?
야광 님, 제가 한번 확인해 볼게요.”
그러나 그 순간—
야광의 몸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귀에는 요한의 소리가 닿지 않았다.
“멀쩡히 잘만 살고 있네.
날 죽여놓고…!”
야광의 목소리는 떨렸고,
그녀의 몸에서는
이전에 없던 어두운 기운이 피어올랐다.
마침내 억눌러온 감정이 폭발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잘만 살고 있잖아!!”
그 외침은 허공을 찢었고,
카페 안 공기가 뒤틀리며 요동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조차—
왠지 모를 섬뜩함에 몸서리쳤다.
야광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한기 어린 입김,
어깨 위로 피어오르는 검은 오로라—
악귀화가 시작됐다.
“야광 님! 잠시만요!
잘못 보신 거예요. 진정하세요!
우린 지금… 신발을 찾으러 온 거잖아요—!”
하지만 야광의 귀엔
이미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그림자처럼 미끄러지며
카페 사장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야광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조명이 깜빡거리고,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녀의 손끝이 컵을 건드리자,
쨍그랑—
깨진 소리가 울렸다.
카페 안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들이쉰 숨을 내뱉자,
차가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요한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처럼 직감이 울렸다.
‘안 돼… 현신이 시작됐어.
이대로면— 누군가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