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큐버스의 의뢰 (5) -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경계
복실이가 이빨을 드러냈다.
그 끝엔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림자도 없는 분명한 저승사자였다.
“삽살개야.”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오늘은 왜 길을 막느냐?
저승까지 저 여인의 안내를 부탁한다.”
저승사자가 마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윤마리.”
멀리서 청소차가 비정상적인 속도로 달려왔다.
요한의 가슴이 철렁했다.
“윤마리.”
카트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안 돼— 요한은 목이 막혀, 말 한마디 나오지 않았다.
“윤마—”
대민이 그대로 마리를 끌어안자,
그들의 모습은 증발하듯 사라졌다.
카트는 마리가 앉아 있던 벤치를 박살 내고 나동그라졌다.
저승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외국 요괴 따위가 동양의 규칙을 깨?”
그 시선이 요한에게 꽂혔다.
“가서 전해라. 숨어봤자다.”
저승사자의 형체가 연기처럼 풀려,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요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5분, 대민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미 끝나 있었다.
“복실아!”
컹! 컹!
복실이가 냄새를 따라 달려 나갔다.
편의점 건물 뒤편,
마리가 벽에 기대앉아 있었고,
그 옆엔 대민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리 누나!”
요한이 달려가 쪼그려 앉았다.
“누나, 괜찮아요?”
마리는 숨을 추스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방금, 뭐였어?”
“공간 이동이요. 인간들에겐 어지러울 겁니다.”
대민이 대답했지만, 마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삼촌은? 너희 삼촌은 어딨어?”
바로 옆에 있던 대민이
마리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지금은 제가 안 보이는군요.”
“누나, 잘 들으세요.
터무니없고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이건 진짜 중요한 일이에요.”
요한은 마리를 똑바로 쳐다봤다.
“누나 이름이 저승사자의 명부에 올라가 있어요.”
자초지종을 들은 마리는 놀랍게도 웃었다.
“어쩐지…
대민 씨 눈빛이 한 달 동안 집에서 느끼던 그 기척이었어.”
요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금방 믿어주는 사람, 처음 봐요.”
“나, 예민하단 소리 많이 듣거든.”
마리는 허공을 훑으며, 기척을 더듬었다.
“그럼… 대민 씨는 지금 어디 있어?”
요한은 옆에 있는 대민의 팔을 잡아 올렸다.
“여기요.”
마리는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요한의 머릿속은 폭주하듯 뒤섞인 생각들로 가득했다.
저승사자를 막는 방법.
부적? 장승 아저씨? 아니면… 등가교환?
어느 것도 확실하진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이 일에는 제대로 된 무속인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
그 순간, 한 얼굴이 번쩍 떠올랐다.
“이태이!”
이태원.
좁은 골목 안은 전 세계를 압축해 넣은 듯했다.
양쪽 식당의 통창이 열려, 외국어와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바람엔 정체 모를 향신료 냄새가 섞여 요한을 스쳐 날아갔다.
골목 한가운데, 넓은 테라스를 둔 이국적인 바가 있었다.
그 건물은 전체가 신당이었다.
낮인데도 테라스에서는 와인잔과 맥주잔이 끊임없이 부딪혔다.
그 사이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사람들 소리는 금세 잦아들고,
숨이 막힐 듯 진한 향이 공간을 채웠다.
계단은 곧장 3층으로 이어졌다.
문 위에는 오방기가 걸려 있었고,
오방색 술과 방울이 바람에 스르륵 부딪혔다.
그 문을 밀자, 부적이 빽빽하게 붙은 벽이 드러났다.
금빛 글씨가 번져 흐르고, 붉은 주사 가루가 종이 끝자락을 물들였다.
안쪽 미닫이문을 열고 본당으로 들어갔다.
벽마다 알 수 없는 부적과 신령의 그림이 빼곡히 붙어 있었고,
천장에 드리운 줄에는
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조각과 작은 방울들이 나부꼈다.
그 아래, 장군신상이 번뜩이는 칼을 움켜쥔 채 서 있었다.
발치에는 돼지머리와 함께 붉은 실로 칭칭 묶인 제물이 놓여 있었다.
그 제물 너머, 상 앞에 앉은 무당이 요한 일행을 응시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
깊게 팬 주름 속 눈동자는 사춘기 소녀처럼 초롱초롱했다.
“안녕하세요. 김요한이라고 합니다.”
여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앉으세요. 장군신께서 이미 말씀하셨어요.”
“말 편하게 해주세요.
저 태이 친구거든요.”
“요한 군, 제 딸한테도 많이 들었어요.
듣던 대로 미남이네요.”
“엄마!”
신당 옆 작은 쪽방에서 태이가 튀어나왔다.
태이는 요한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요한도 짧게 답했다.
“그래서 윤마리 양이 명부에 올랐다고요?”
“네, ‘숨어봤자 소용없다’라고 했습니다.”
무당이 붓을 들고 종이 위로 붉은 선을 그었다.
‘天鬼退散符(천귀퇴산부)’
“이 부적이 있으면, 저승사자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에요.”
“확실한 방법은요?”
요한의 절박한 물음에도 무당은 대답은 단호했다.
“없어요. 명부에서 지우는 것도,
저승사자를 완전히 막는 것도.
할 수 있는 건 눈속임뿐입니다.”
마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요한이 대민을 보자, 절망이 고스란히 비쳤다.
“그래도 시도는 해야죠!”
요한은 부적을 손에 꽉 쥐었다.
무당은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이걸 대문 밖에 붙이고, 절대 나가지 마세요.”
마리는 저승사자의 눈을 속이기 위해 옷을 거꾸로 입었다.
그리고 요한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은 한강 변 오피스텔이었다.
“신기하네.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당연히 대민 씨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인큐버스는…
잠자리로 바로 이동하기 때문에 모른대요.”
마리는 거꾸로 입은 옷이 민망한지,
옷매무새를 고쳐 잡았다.
도착 후, 요한은 부적을 문 앞에 붙였다.
“이제 대민 삼촌이 같이 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방법을 더 찾아볼게요.”
“응, 대민 씨가 느껴지는 것 같아.
고마워, 요한아.”
“제가 올 때까지 절대 나오지 마세요, 누나.
삼촌, 마리 누나 잘 지켜주세요.”
대민은 대답 없이 요한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요한이 떠나자, 오피스텔 안은 고요했다.
침묵을 깨고 마리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대민 씨, 여기 있죠? … 고마워요.”
그녀는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사실 저에겐 아무도 없어요.
일밖에 없었죠. 가족도 없고.
근데… 대민 씨가 밤에 같이 있어 준 뒤로,
외로움이 사라졌어요.”
그녀는 침대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 자신도 믿기 어렵지만,
대민 씨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다 알게 됐는데,
대민 씨의 마음도, 내 마음도 다 알게 됐는데…
나, 살고 싶어요…
살아서 같이…”
마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덜컥’ 하고 흔들렸다.
어디선가 서늘한 한기가 흘러들어 발목을 감쌌다.
대민이 눈을 부릅뜨고 현관문 너머를 꿰뚫어 봤다.
그때—
문 앞에 붙어 있던 부적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