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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숲 Mar 11. 2016

가난한 청년들

브런치에서 글쓰기

 브런치에서 글을 올린지 며칠이 되었다. 사실 별로 누군가  글을 읽을 거란 생각이  드는 이유는 브런치가 활성화 되면서 많은 글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 나는 안심하고 글을   있다.


 내게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하며  듣고 싶은 충동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얻고 주목받고 싶은 충동은 다르다.


하고 싶은 말이 없던 시절에도 나는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해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글쓰기란 사람의 아름다운 행위  하나이다. 인터넷이  갈증을 해갈해 주려는 ,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주고 분별해주고 세상에 띄워보내주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정보로 갈피를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때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하기 싫을 때도 생긴다. 너무나 소중한 경험과 이야기에 대해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미련 때문이다. 모두가   있다면 보물이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나에게만 보물인 고물일 수도 있고.


그런데 함께 생각을 나눌 수록 혼자만 간직하던 고물도 보물이 되어갈 수도 있다. 나만 지니고 있어도 되는 개인적인 체험은 내가   안다. 언젠가 죽고난 뒤에  개인적인 체험들은 사라질테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좋은 이야기만 남아서 좋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 충만한 인생이  것이다.


이직을  뒤에, 다시 한번 안정적인 삶에서 쫒겨난 -정확히는 내가 걷어찬- 기분에 마음이 뒤숭숭해진 나는 에릭 호퍼의 '길위의 철학자', '부두에서 일하며 사색하고' 빌려 보았다.


떠돌이 노동자였던 에릭 호퍼의 글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지고 공감을 느끼는 바람에 내가 떠돌지 않았음에도  일부는 관찰자이자 떠돌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도 주어진 환경에서 떠돌아다니며 돈을 벌었다. 돈을 아예 못버는 시기도 있었다.  시기에는 어느 때보다 많이 읽고 생각하고 글을 썼다. 하지만 고통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었다.


시간제 노동자로 간신히 생활비를  만큼만의 급여를 받으며 20 중반을 보낸  같다. 그럼에도 돈이 없어 걱정했던 시기가 대부분이었다.


이직을  뒤에도 혹시라도 한달간 일한 임금을 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며 초조해했다. 그러면서 어째 화가 났다가 스스로 한심해지며 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돈이 없다고 생각될 수록 나는 나눔에 인색해졌다. 주위에 무언가를 해주고 싶고 친절을 베풀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아예 사람을 만나질 못했다. 이것이 대도시의 특이한 공통 현상처럼 느껴졌다.


작은 공동체와 공유하는 일과 생활공간이 없으므로 공적인 장소는 상업적인 장소로 대체되었고, 사람을 만나려면 식당이나 카페, 가게를 찾아야한다. 게다가 대도시에서는 대체로 일을 가거나 친구를 만나려면 한시간씩 버스를 타야했다.


푼돈이라도 있어야 누군갈 만날  있다는 사실은 아무 조건 없이 서로 어울릴  있는 대인관계에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돈을 못벌때에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돈을 정기적으로 벌며  가지 일만 꾸준히 하면 되겠지만, 나는 내가 갈망하는 일을 찾고자 가난하더라도 선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젊음은 생명의 축복이지만 우리 시대에 가난한 젊은이는 죄인이다.


전반적인 20대에 나를 억압한 생각은 사회적 의무에 대한 죄의식이었다. 그것은 사회적인 책임감으로 일하지 않거나,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지 않거나, 가족들에게 보탬이 되지 않으면 마땅히 해야할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무능력자처럼 느껴지는 죄책감을 말한다.


이런 심리적인 고통은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생생하게 청년들을 괴롭히며 위축시킨다. 그렇다면 돈을 벌면 문제는 해결될 것인가?  많은 돈과  많은 안정을 요구하며 계속 고통에 시달릴 것인가?


안정적인 벌이와  속에서는 배우고 생각하며 글쓰는 일에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것인가?


에릭 호퍼의 말을 끝으로  문제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고싶다.


 "절망과 고통은 고정된 현실이다. 상승의 활력은 희망과 긍지로부터 나온다. 사람들을 반항하게 하는 것은 실제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에 대한 희구이다."


희망은 독이 될 수 있지만 용기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어쩌면 사회를 움직이는 이들도 고통 속에서 반항하는 이들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이들도 그런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달음을 찾는 철학자들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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