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한나 Sep 25. 2022

건대극장, 그럼에도 찬란함을 쫓는 사람들

FUCK 허무주의


2022.09.25.

그럼에도 찬란함을 쫓는 사람들, 건대극장
(Fuck 허무주의)


얼마 전 <언컷젬스>라는 영화를 보았다.

<언컷젬스> 포스터


주인공은 계속해서 시궁창을 달리고

그곳에서 벗어나려 세운 그 어떤 계획들도 결코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가지 않는다.

그러다 영화의 끝에 주인공은 크게 성공하게 되는데,

그러자마자 빚쟁이의 총에 맞아 죽어버린다.


그걸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텐데

왜 그리도 뭔가를 이루어내려 발버둥치는가?

왜 그리도 희망을 보면서 절망에 부딪히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가...




어제 내가 주연을 맡은 연극이 끝났다.

복학을 위해 서울에 오자마자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사실 대단한 걸 바란 건 아니고,

거기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정재원'이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 형은 이번 연극 <한 여름 밤의 꿈>의 연출이자

건대 연극 동아리 '건대극장'의 55기, 19학번 나와 동기인 분이다.

하지만 나이는 스물 다섯으로, 나보다 두 살이 더 많은 이유는 삼수를 했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났던 건대극장 신입생 환영회 회식 자리가 떠오른다.

그는 준규 형 옆에서 조용히 웃기만 하던 사람이었다.

활발하지도 않고 소극적으로만 보였다.

혹자는 그가 건대극장에 오래 남아있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건대극장의 크고 작은 공연과 행사들에 꾸준히 참여했다.


그리고 19년 가을, 건대극장 동문 자축회 행사 때 그는 내게 한 잔의 술도 없이

내면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다.

사회적 기대와, 스스로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고

끝없이 바닥으로, 바닥으로, 바닥의 바닥으로 침전되었던 시절,

몸과 마음이 함께 붕괴되어가던 시절-

그의 고요 속엔 그런 심연이 잔뜩 꼬여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연극을 맡았다.

광대 '론슬롯' 역할, 광대라는 배역의 특성상 관객을 휘어잡아야만 하는 역할이었는데

나 역시 그 극에 참여했던 입장으로서 그의 성장 서사를 꾸준히 지켜보았다.

원래는 대본대로만 하던 그가 대본도 없이 무대 위에 서기까지,

관객의 눈도 못 마주쳤던 그가, 관객을 불러내 같이 작용하고 거대한 호응을 이끌기까지...

그 어쩌면 뻔한 플롯 뒷면에 숨겨진 뻔할 수 없는 눈물을 안다.

그건 그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프고도 찬란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그가 <베니스의 상인> 다음으로 <덕수 삼촌>이라는 연극에 참여했다.

이제는 주연을 맡은 것이다.

사실 내가 군복무를 하고 있던 때라 보진 못했다.

하지만 연기의 엄청난 호평을 받은 것으로 전해들었다.


그리고 <진실>이라는 연극에도 참여했다.

이번엔 배우이자 연출까지 맡은 것이다.

"그냥 이게 저예요."로 끝나는 대사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단막극.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 본 그의 연극은 완성도를 떠나서 가슴이 미어질 만큼 아팠다.

그리고 가장 큰 품을 벌려 안아주고 싶을 만큼 대견했다.


단막극 <진실>, 1:20:00부터 정재원 형의 연극 시작




그러던 그가 이젠 단막극도 일인극도 아닌, 무려 29명이다 되는 인원의 연출을 맡겠다고 했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끊임없이 벽을 깨려 발버둥치는 그가

대견하기도 하면서 기대되기도 하면서, 걱정이 앞섰다.

그의 곁에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전역을 하고 난 바로 다음, 방학 시즌이라 대구에 머물러야만 했기에 불참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8월 30일, 공연이 3주 정도 남은 시점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는 복학을 해야해서 서울로 갈 채비를 하던 참이었다.

"주연 배우 한 명이 빠졌어. 너 혹시 해줄 수 있니?"

이제는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네.




그렇게 9월 24일, 마지막 공연까지 매일을 연습했다.

곁에서 본 재원이 형은 재원이 형다우면서도 의젓한 연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오랜 건대극장의 동문 선배 같아 보이기도 했다.

참 멋졌다.


재원이 형뿐만 아니라, 같이 공연을 올린 모든 공연팀들...

모두 찬란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모두 그걸 잘 알고 있다.

그 사실을 누구나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찬란히 버둥거렸다.


그리고 그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Bye LG, Hi Galax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