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천명을 짊어지는 일
<일 포스티노> 감상/후기/리뷰/해석/결말
: 시인의 천명을 짊어지는 일
기본 정보
장르: 드라마
국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감독: 마이클 래드포드
주연: 필립 느와레, 마시모 트로이시, 마리아 그라지
영화 간단 줄거리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
바다와 가난한 바보들이 매일 비슷한 파도를 순환하는 곳,
청년 마리오는 그곳을 떠나고 싶어한다.
어느 날 그 마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 파블로 부부가 머물게 되고,
마리오는 그를 위한 우편물 배달원이 된다.
마을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파블로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리오는 파블로에게 온 편지들을 전하며 시를 배워간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게 되고, 그 마음을 은유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마을과 이웃들을 사랑하게 되고, 비로소 한 편의 시를 완성하게 된다.
<일 포스티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시인과 시에 대한 영화'다.
'시인과 시에 대한 영화'라 함은
사랑과 투쟁, 성장에 대한 영화와 동의어라- 나만의 정의를 내렸다.
영화 간단 후기
들어가는 말
얼마 전 인터넷에 올린 나의 글을 보고 메일이 한 통 왔다. 자신을 팬이라고 소개하며, 글을 잘 쓰는 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참 과분한 메일이었다.
스스로 내 글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누군가에게 알려줄 만큼 대단하지는 않기에, 또 글쓰기란 것은 편지처럼, 기술이 아닌 마음의 영역이기에 참신한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보편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전할 뿐이었다. 다만, 해석하기에 따라서 조금 더 짙어질 수는 있는 바다 몇 개 펼쳐둘 뿐이었다.
얼마 뒤 답장에 대한 답장이 왔다.
제가 추천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사랑스럽다고 표현하기 위해
참신한 구조와 표현들을 떠올리며
작품을 완성해가는 일은 참으로 사랑스럽습니다.
이 문장이 깊게 박혔다고 한다. 사랑하는 것을 쓰는 것, 사랑한다는 것, 그건 참으로 숭고하고도 사랑스러운 일이다.
시인이라는 슬픈 천명, 그 이유 : 은유
시는 은유의 예술이다. 영화 속 파블로와 정호승, 서정윤 등 수많은 시인들이 은유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은유란 단순히 말하자면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그 대상 혹은 감정을 면밀히 분해하고 재조립해야 한다. 그렇게 전혀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한다. 시인은 그러한 시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남들과 다른 시선을 지닌다는 건 시에 가까워지는 일이지만, 동시에 외롭고 쓸쓸한 일이다. 남들은 바다를 보며 고기만 보지만, 시인은 바다를 보며 베아트리체의 온기를 느낀다. 누군가에겐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팔고, 살아가며 마땅히 겪는 일일지언정, 시인에게는 처절한 비극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은유를 품는 것만으로 엄청난 간극이 생기며, 그건 쓰지 않고는 외로워서 버틸 수 없는 천명을 짊어지는 것이다.
파블로가 본국에서 추방당한 것도, 마리오가 베아트리체의 고모나 다른 어부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백석이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고 한 것도, 모두 남들보다 높은 시선을 지녔기 때문이다.
나 역시 시인을 꿈꾸며 은유의 고도를 느껴본 사람으로서, 그들이 보고 느끼는 것을 아득히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외로움마저 사랑하는 법: 느끼고 걷고 써내려가기.
파블로가 떠난 뒤 남겨진 마리오는 파블로가 자신을 기억하고 언급해주길 기다린다. 단순히 인정받거나 사랑받고 싶은 것을 떠나, 은유를 품게 된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이 시인 파블로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파블로는 어째서인지 이탈리아에 대한 인터뷰에서도 그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심지어 마리오에게 전하는 편지에서도 감사나 그리움의 메시지를 담지 않았다. 그저, 남은 짐을 보내달라는 지령 뿐……. 실망을 숨긴 채 파블로의 집으로 가 짐을 챙기던 중, 전에 함께 녹음했던 오디오를 발견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보게.”
“못해요.”
“할 수 있어.”
마리오는 파블로의 요구에 ‘베아트리체 루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만을 언급한다.
그걸 다시 들어본 마리오는 뭔가를 깨닫고 바로 실행에 옮긴다. 파도 소리와 종소리, 성당의 신부님 목소리, 베아트리체 뱃속 아들의 심장소리…… 그러한 마을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을 녹음했다. 어느새 높아져서는 “떠나야겠어. 여기 사람들은 너무 멍청해.”라고 말했던 마리오가, 이 마을이 아름다운 이유로 마을의 일상을 제시한 것이다.
자신을 외롭게 만들었던
낮고 일상적인 것들을 먼저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마리오는 사람들과 함께 설 수 있었고,
연단에 설 정도로 칭송받게 되었으며,
비로소 한 편의 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블로가 돌아왔다.
좋은 시는 단순히 은유를 지니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건 아닌 듯 하다. 그 높은 시선으로 마땅히 무릎을 꿇어, 낮고 가련한 것들, 평범하고 가난하고 멍청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쓰다듬고 느끼고 비로소 사랑해낼 때, 그때 비로소 좋은 시와 시인이 탄생한다. 마리오는 그렇게 먼저 사랑하는 법을 깨닫고서 비로소 시인이 되었다.
결말 해석
마지막 장면의 의미 : 숭고한 천명, 사랑의 계승
다시 돌아온 파블로는 마리오가 남긴 녹음을 듣는다. 들으면서 그와 함께 했던 해변을 거닌다. 마리오가 남겼다는 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나약한 영혼들을 사랑하기 위해 공산주의 사상을 택한 것으로 보이며, 그 탄압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 그 시가 담긴 종이는 짓밟혔다.
그 시의 제목은 ‘파블로 네루다께 바치는 노래’. 파블로의 ‘모두의 노래’와 닮아있다. 그 시를 들으면 마리오 자신과 이탈리아에 대해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만으로도 그 시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다. 그 시는 마리오가 자신의 초라한 마을을 사랑하게 되는, 혹은 사랑하는 그런 시일 테다. 그리고 그것이 파블로, 당신 덕이라고 말하는 내용일 테다.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편집 연출을 활용하여 시인의 숭고한 천명, 사랑의 계승에 대해 표현한다. 마리오의 시가 적힌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과, 파블로의 얼굴을 크로스 오버시킨다. 그리고 해변에 선 파블로의 풀샷, 절벽 전체가 다 드러나 인물의 형체만 보이는 풀샷으로 전환된다.
이는 마리오가 파블로의 시를 동경하며 그의 시를 품고 살았듯, 파블로 역시 마리오의 시를 품고 살게 될 것이라는 것, 마리오가 사랑하게 된 그 해변과 절벽과 마을을 더 깊게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은유한다. 그렇게 시는 시인을 만들고, 순환하듯 사랑을 계승하게 된다. 그건 외로워도 행해질 수밖에 없는 시인의 숭고한 천명이다.
투명하지만 깊이 우린 차 같은 작품이다. 짙고 깊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다.
- 몇 장면들에서 주제 의식을 흐리거나, 그것이 덜 선명하게 표현된 점
- 중반부가 조금 늘어지는 반면, 후반부는 조금 급하게 몰아치는 점
- 파블로란 인물이 이탈리아를 떠난 후, 마리오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연출적으로나, 연기적으로 더 명확한 근거를 지니지 못한 점
- 사상적인 편파를 지닌 점
등등의 아쉬움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충분히 상쇄할 만큼 훌륭한 점들이 많다. 시인에 대한 깊은 이해로 고차원적인 통찰을 담아낸 점, 맑은 사람과 맑은 풍경이 서로 사랑하는 맑은 영화라는 점, 그것을 충분히 관객들에게 전달해냈다는 점… 등이 그렇다.
스스로 묻는다.
나는 내가 쓴 메일처럼 사랑하는 글을 써왔나.
마리오가 베아트리체와 파블로에게 그러했듯, 사랑해온 것들만 사랑하진 않았나.
그렇지 않은 것들은 미워하고 배척하진 않았나.
나도 결국 마리오가 그러했듯, 시인의 천명을 욕심 없이 짊어지고, 미워하던 것들까지 사랑하는 한 편의 은유를 완성해내기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