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산티아고순례길4일차.
아침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다. 난생처음으로 보는 4월말에 내리는 강한 눈보라. 다음 목적지인 폰페라다까지 27km라는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하고 1500m 산꼭대기를 내려 가야한다.
어제 이렇게 높이 올라온 줄도 몰랐는데..시작부터 막막함이 몰려온다.
구름 속에 갇혀 있어서 시야가 사방으로 막혀있고, 눈보라가 정면으로 따귀를 때리듯 세차게 불어와서 고개조차도 들 수 없다.
궂은 날씨에 산을 내려간다는 것 자체가 공포감으로 느껴진다.
이 길을 가는게 맞는건지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느라 시간을 꽤 지체할 무렵.
첫날 레온에서 잠시 길을 물었던 아저씨 일행을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지나간다. 내가 혼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니 자기들을 따라서 내려오라고 손짓한다.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냉큼 뒤를 쫓아간다. 꽤 키가 큰 아저씨 일행은 보폭이 어찌나 큰지 조금만 천천히 가도 구름 속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까봐 다리가 아픈 것도 잊은 채 걸었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눈보라와 구름 속을 벗어나 산중턱 쯤 부터 푸릇한 기운들이 조금씩 고개를 내민다.
새소리가 지저귀고 눈 속에 피어 있는 꽃들,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흐르듯 기분이 묘하다.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무섭고 험난했는데 갑자기 평화가 찾아온 느낌이 들어서 감사한 마음에 울컥한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새소리. 이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동영상으로도 담아본다. 나만 듣고 느끼기에는 아깝다.
짧은 시간동안 다양한 감정과 경험을 겪는다.
갈 수 없을 거라고 의심하고 포기하려던 길을 이렇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걸어올 수 있었다. 사실 그냥 뒤를 쫓아온 것 뿐인데 때로는 함께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음을.
눈보라가 치는 역경과 고난을 마주한 순간에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가면 언젠가는 구름이 걷히고 온화함을 맞이할 수 있음을. 이 길은 인생의 짧은 함축판과 같은 느낌이다.
새삼 숙연해지고 한없이 감사함을 배우는 순간이었다.
요 며칠 말썽이던 발의 통증이 종아리까지 몰려와서 종아리경련까지 몸을 고되게 하지만 어제의 힘듦이 지나가고 나니 어느정도 적응이 되어간다. 언젠간 지나가겠지. 아픈 것도 곧 익숙해지겠지.
이제 몸이 아프다고 감정의 동요를 받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적응이 필요하니까. 나도 이 길과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다. 한동안 머릿속에 떠나지 않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감사함으로 변하다니.
한참을 내려와 스페인에서 아름다운 마을로 지정된 몰리나세카 마을을 만난다. 고생한 몸을 녹이기 위해서 bar에서 커피 한잔을 마신다. 어제 까지만 해도 빨리 도착해서 쉬고 싶어서 한번도 쉬지 않고 걸었는데 이제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는 방법도 터득중인가보다.
오들오들 떨었던 몸이 커피 한모금으로 치유가 되는 느낌.
소소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눈보라 치던 산을 내려왔던 기억도 한 편의 에피소드처럼 추억으로 신기했던 경험이 되었다.
잠시 쉬어 가는 몰리나세카도 아름다워서 벤치에 앉아서 한참을 감상하고 다시 힘을 내어 마지막 8km를 걸어간다.
<4일차. 폰세바돈~폰페라다.27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