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게시판에 강좌 포스터를 붙일 때 까지도 C는 자신이 없었다. 과연 수강생이 오기나 할까. 제목부터가 이상했다. '봄날 꿈같은 독백 나누기' 라니. '자서전 함께 읽고 쓰기' 정도의 평범한 제목을 생각하고 있던 C는 강사가 제안한 강좌 제목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강사료를 드릴 형편도 못돼서 고맙게도 재능기부를 해주겠다는 이웃 작가의 제안을 C는 고맙게 받아들였다. 제목이 좀 이상하면 어떤가. 덕분에 흥미를 갖고 찾아오는 수강생이 있을 수도 있고, 라는 생각이 가슴 저편에서 묘하게 올라오는 거부감을 눌렀다.
강좌 첫 날, 수강생은 모두 네 명이었다. 빈 자리가 많아 민망했다. C도 슬금슬금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강사는 말 한 마디 없이 앉아 있는 수강생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 대뜸 질문을 던졌다.
“지금 머릿속에 있는 그 분, 그 분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여인은 당황해서 얼굴이 상기되어서는 옆의 사람을 쳐다보았다. 도와달라는 뜻이었지만 옆 사람의 난감한 표정에 바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 되어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여인의 정면에는 거울이 있었다. 저기 원래 거울이 있었던가. C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인의 이야기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마치 거울 속에서 실타래를 뽑듯이,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여인은 '그 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강생들은 숨소리도 낮추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강좌가 진행되는 서점 구석 자리의 조명은 거울 속, 이야기하는 여인을 비추고 있었다. 여인의 감정이 고조되어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수강생들도 같이 긴장하여 서점 안에 열기가 도는 것 같았다. 고달프게 이어지던 그 분의 이야기는 소소한 행복감으로 마무리되었다. 여인의 시선이 거울을 벗어나 강사에게로 향했다. 강사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강생들이 진심이 담긴 박수를 보냈다. 무거웠던 서점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강사는 다시 수강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강사의 시선은 네 명의 얼굴을 지나 C에게서 멈췄다. C는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옆의 수강생들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숨을 고르고 C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딱 집어서 이야기의 주인공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것이 얼마 전 사라진 작가 크프우프크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C는 오랜 친구였던 크프우프크가 가끔씩 들려준 본인의 이야기에 자신의 추측을 더해 그가 평생을 피해 다녔던 가족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야기의 말미에 깊은 연민과 허무의 색조가 더해지자 수강생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쉬는 시간. C는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던 여인의 얼굴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여인에게 커피를 건네며 C가 말을 걸었다.
“제 이야기가 혹시 언짢으셨으면...”
“저는 알아요.”
“예?”
“진짜 크프우프크를 조금은 안다고요. 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다른 분들은 어쩌죠?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그 분을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C는 아차 싶었다. 젠장. 봄날, 꿈같은, 여기에서 정신을 놓고 만 것이다. 제목이야 어찌되었든 자기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런데 어쩌자고 크프우프크를 끌어들인 걸까. 잠시 후 강사는 두 번째 시간을 시작했고 이야기는 이어졌지만 C의 머리는 뒤죽박죽이 되어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인연을 맺었던 친구들, 지인들의 모습이 연이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들과 나눈 말들, 함께 했던 시간들,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흐릿해져서 그중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수업이 끝날 때쯤에는 머릿속에서 하나의 문장이 반복되었다. '나는 가짜야. 내 삶은 가짜야.'
그렇게 강좌가 끝날 시간이 되어서야 C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번 강좌의 제목이 ' 봄날 꿈같은 독백 나누기'였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