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수없이 많다. 최소한 사람 수 만큼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M도서관 종합자료실에서 근무하는 i가 지하철역 반납함을 통해 들어온 책 속에 끼워져 있는 그 신호를 발견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처음엔 그저 이용자가 끼워놓은 책갈피려니 생각하고 포스트잇을 제거한 다음 바로 배가했다. 이용자가 많은 도서관이었고, 어느 책 페이지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지 확인할 여력은 없었다. 연두색 포스트잇을 서른 개 쯤 떼어내어 버릴 때 쯤 에야 이게 뭐지? 하는 의문이 생겼다.
포스트잇은 페이지 사이가 아니라 페이지 중간에 붙어 있었다. 읽은 페이지를 표시한다기보다는 책의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 표지로 보였다. 포스트잇이 가리키는 문장은 거의 짧은 의문문이었다. 특별히 의미 있어 보이는 문장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걸 다 버려도 될까요?"라는 말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i는 그날부터 연두색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곳의 문장을 연결해보기 시작했다. 연두색 포스트잇이 붙은 책은 매일 들어왔다. 대출자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문장이 일주일치 모이자 의미있는 텍스트로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장난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뜻밖에도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같았다. 이용자 정보에는 사진이 없었고, 비고란에는 몇 권의 책을 분실, 훼손하여 변상한 이력이 있다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몇 권의 책이라면 실수인 것 같지 않았다. 호기심이 생긴 i는 연두색 포스트잇을 따라 의미를 파악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한 문단 정도의 글이 완성되었다.
‘비가 오니까 오늘은 잠들 수 있을까요? 여전히 바쁘군요. 주말엔 뭐해요? 늘 보던 곳에서 볼까요? 난,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픈 건 아니죠? 나도 알아요. 조금만 더 들어주면 안될까요?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길을 걷다 문득 생각이 났어요. 다 잊어버려요. 청소하기 좋은 날이네요. 이걸 다 버려도 될까요? 그럼 뭐가 남죠?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이러다 늦겠어요. 바로 지금이에요. 일단 출발해요. 뭐 놓친 거 없을까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파요. 이런 젠장. 너무하시네. 난 한번도, 아니야, 이제 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 혹시 아세요? 알아요. 이해해요. 뭘요? 안다구요. 아닌 것 같은데.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기억나요?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요?...’
i는 여기서 멈췄다. 그리고 이번에는 포스트잇을 떼지 않고 책을 배가하기로 했다. 대체로 잘 빌려가지 않는 책들이었다. 연두색 포스트잇이 붙은 책은 그 후로도 매일 들어왔고 얼마 후 리모델링 공사 때문에 도서관은 석 달간 휴관에 들어갔다. 석 달 후 도서관 문을 열고 책상 정리를 하던 i는 문득 생각이 나서 인근 도서관 자료실 근무자에게 전화를 했다. "저기 혹시 거기, 연두색 포스트잇이 붙은 책들이 반납되지 않나요? 지하철 반납함에서요." "포스트잇 같은 거 붙어 있음 바로 떼버리는데, 찾는 책이라도 있으세요?" "음 그게, 아뇨. 됐어요. 그냥 알아볼 게 있어서요."
이후로는 연두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책은 반납되지 않았다. 그리고 석 달 전 i가 책 속에 남겨놓은 연두색 포스트잇은 모두 제거되어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대출자 정보를 확인하던 i는 당황해서 옆의 직원에게 물었다. "그 분 왜 제적처리된 거야?" "아, 그 연두색 포스트잇이요? 어디 멀리로 이사 간다고 회원정보 지워달라고 했다던데요?" 리모델링 기간 중에 사무실로 연락을 했던 모양이다. 왠지 미안함과 함께 까닭모를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래서였는지 그날 밤 i는 연두색 새가 부리에 편지를 물고 먼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결국 그는 직접 편지를 전달하기로 한 모양이라고 i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