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야, 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가방 끈을 움켜쥔 손이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벌떡 일어나 가버릴 것 같아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뭐든 그녀의 마음을 달래줄 말이 필요했다. 옆 테이블 손님들이 일어나 계산을 하고 나갔다. 마지막 손님이 된 그와 그녀는 동시에 시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영업시간은 남아있었지만 손님이 별로 없는 수요일, 주인장은 마지막 손님이 어서 일어나주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다른 데 가서 얘기하자. 그가 겨우 말을 꺼냈다. 그녀는 대답없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를 앞서 계산대로 가서 카드를 내밀었다. 아니야, 내가 살게, 그가 그녀의 손을 살짝 밀치며 말했지만 그녀는 자기 카드를 주인장의 손에 쥐어주었다.
바깥 공기는 차가웠다. 봄이라지만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데다 바람까지 불어 술집 골목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그녀를 말린다는 게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녀는 지겹다고 했다. 항상 똑같은 출퇴근길도, 매일 반복되는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벌써 10년째 똑같은 직장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도. 그래서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그녀로서는 힘들게 꺼낸 말이었는데 그가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화근이었다. “네가 무슨 다른 일을 한다고 그래.”
그녀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그리고는 입을 꽉 다문 채 얼어붙은 시선으로 테이블 위의 안주와 술잔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디 매인 데 없이 자유로운 그의 삶이 부러웠다. 집을 짓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는데 유산을 비교적 넉넉하게 물려받은 덕분에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걸린 데 없이 살고 있었다. 집과 직장만 오가며 시계추처럼 사는 그녀와는 너무도 다른 삶이었다.
둘은 언젠가 함께 짓고 살 아담하고 예쁜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야기 속의 집은 날로 구체화되어 언제든 바로 들어가 살기만 하면 되는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거의 진전되지 못했다. 주말마다 만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고 헤어지는 순간은 더 이상 아쉬움을 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끔은 그의 프로포즈를 기다렸지만, 타이밍을 몇 번 놓친 뒤로는 둘 사이에 프로포즈라는 사건이 생길 일은 없어보였다. 처음엔 그녀의 해외 발령이 문제였다. 1년간의 해외 근무라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결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연애나 하는 게 어때, 라는 말을 장난처럼 했고 그는 쿨 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문득 둘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정리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두 사람 사이에 떠올랐는데. 이번에는 그가 새로운 공부에 빠지면서 둘의 관계가 무거워지는 걸 원하지 않게 되었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그녀의 삶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이 좋았다. 주말마다 습관처럼 그를 만나는 것도 편안했다. 그러다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어느 날 그녀의 직장으로 걸어 들어온 뜻밖의 O. 10년 전의 그를 떠올리게 만든, 놀랍도록 엉뚱하고 독특한 분위기의 O. 커리어 코치였던 O가 유독 그녀에게만 특별한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그간의 직장생활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로드맵을 설계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O의 말이 송곳처럼 가슴을 콕콕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0년 동안 집과 직장만 오갔던 그녀가 자신의 삶을 바꿔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문제는 바꾸고 싶은 그 삶에 그의 자리가 없어졌다는 것. 그와 함께 아담하고 예쁜 집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O의 코치를 받으며 나름 짜임새 있게 앞으로의 계획을 짜놓고 그와 마지막 만날 약속을 잡았다.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새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라고 말한 것이었는데, 그는 믿지 않았다. 사람은 바뀌지 않아. 사람은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거야, 라고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둘이 함께 진짜 집을 짓지는 못할 거라고. 같이 살 집이 없는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될 거라고. 그리고 그 결국이 바로 지금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오랫동안 그녀의 명치에 걸려 있던 돌멩이 하나가 쑤욱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