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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탁소리 Mar 20. 2021

#18 필경사 바틀비

  서점 2층에 사는 그가 편의점 유리문에 붙어 있는 '야간 알바 구함' 문구를 본 것은 그 날 오전이었다. 적어도 여섯 시간은 고민한 끝에 그는 편의점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별난 인상이었어요.”     

  편의점 주인이 <달의 궁전> 주인에게 말했다.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이네요. 그 길고 홀쭉한 뒷모습 말이죠.”라고 편의점 주인은 덧붙였다. 술집 <달의 궁전> 주인에게 잠시 편의점을 맡겨놓고 저녁을 서둘러 먹고 들어온 참이었다. '내일 저녁부터는 그 친구가 여기 편의점에서 일하겠군.' <달의 궁전> 주인은 생각했다.      

  편의점 주인은 다음날 저녁 7시에 출근한 그를 B형, 이라고 불렀다. B는 단 하룻밤 만에 매장안의, 어수선하게 놓여있던 상품들을 자기 식으로 정돈해놓았다. 다음 날 아침 교대하러 나온 편의점 주인은 깔끔해진 매장과 창고 안에 쌓여 있는 유통기한 지난 상품들 때문에 두 번 놀랐다. B는 전날 저녁 기준으로 유통기한 지난 상품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창고에 빼두었다.      

  “계속 냉장 상태에 있어서 오늘까지는 괜찮은데...”라고 말하는 주인의 당황한 얼굴을 본  건지 안 본 건지 B는 꾸벅 인사를 하고 퇴근했다.      

  다음 날 아침 주인이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 B는 편의점 테라스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두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학생들이 등교 길에 다 볼 텐데 어른들이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있으면 되겠냐고 B는 조곤조곤 말했다. 두 남자는 “아침에 마시든 저녁에 마시든 내가 내 돈 주고 마시겠다는데 웬 참견이냐”며 소리소리 질렀다. 주인은 눈짓으로 이제 그만 퇴근하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B의 얼굴에는 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설 때 까지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할 수 없이 주인이 나서서 두 남자를 달래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이라 안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주인이 난처한 얼굴로 사정하자 두 남자는 오래 버티지 않고 자리를 떴고, 그걸 보고서야 B는 집으로 향했다.      

  아침에 편의점에 나올 때마다 주인은, 오늘은 또 무슨 엉뚱한 일이 벌어질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어떤 경우에도 B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으면서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황하고 놀라고 화나서 소리치는 것은 언제나 주인 쪽이었다. 그래도 사람을 들였는데 한 달은 두고 봐야지 싶어서 주인은 참고 또 참았다. 사회생활을 안 한지 오래 돼서 융통성이 없나 생각했고, 사실 B의 주장이 틀린 건 아니었다. 편의점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개 동네 사람들이라 어리바리해 보이는 나이든 알바에게 어느 정도는 관대해서 그나마 주인이 인내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B가 편의점에서 일한 지 일주일 째 되던 날, 일이 터지고 말았다. 편의점에 뭘 두고 와서 밤에 잠깐 들른 주인이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들어온 주인 앞에 펼쳐진 장면은 기이했다. B가 계산대 뒤에서 앞의 손님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앞에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는 손님이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일은 어찌 무마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B가 상대하고 있던 사람은 주인이 밤 근무를 못하게 된 것을 못내 아쉬워하게 만든 ‘그녀’였다.      

  환경 부담금 20원이 문제였다. 손님들이 물건을 담아가려고 비닐봉투를 쓰게 되면 20원을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스름돈을 10원 단위로 주는 것도 불편하고, 단골들에게 봉투 값 얘기하기는 좀 그래서 봉투 옆에 환경 부담금을 넣도록 저금통을 마련해두기만 하고는 굳이 내라고 하지는 않고 있었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20원을 내겠다는 사람도 없어서 저금통은 늘 비어 있었다. 주인은 손님들 없을 때 가끔 잔돈을 채워놓곤 했다. 다행히 지난 일주일간 B가 꼬박꼬박 20원을 받는 것을 문제 삼은 손님은 없었던 모양인데 그녀가 하필 현금을 갖고 온 것이 문제였다. 맥주 캔 4개를 사고 현금 만원을 내밀며, “봉투에 담아주세요”라고 말한 그녀에게 B는 “환경 부담금 20원을 내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당황한 그녀는 “저 잔돈 없는데요.” 라고 말했고. B는 “그럼 취소하고 20원 넣어서 다시 결제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번거로운데 다음에 드리면 안 될까요?”라고 그녀가 말했고, B는 “전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당황한 그녀가 '주인 분 계실 땐 그냥 주셨는데, 오늘만 그냥 주심 안 될까요?"라고 살짝 사정조로 말했는데 그럼에도 B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단호한 목소리로 “환경 부담금은 내셔야죠.”라고 말했다. 가르치듯 하는 B의 말투는 이 시점에서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다음에 드린다고요. 저 여기 단골이에요.” 이제 그녀의 어조에도 언짢음에 묻어나기 시작했는데 B는 “다음에 내실지 어떻게 압니까, 지금 내셔야죠.”라고 말하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진 그녀가, “그럼 그냥 취소해주세요”라고 카드를 내밀자, B는 “제가 결제 취소할 동안 상품은 제자리에 놔주시죠.”라고 말했다.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너무 하신 거 아녜요?”라고 소리를 질렀고, B도 버럭 “제가 뭘 너무했다는 겁니까?”라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주인은 일주일 만에 다시 '야간 알바 구함'이라는 문구를 붙이면서 건너편 서점 2층의 창문 쪽을 힐끔 바라봤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은 원리원칙대로 다 지켜야 하는 B가, 이 세상을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그가 모르는 수많은 예외들에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 온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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