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M도서관 종합자료실에서 근무하는 i가 한 직장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기간은 1년이었다. 성격이 좋지 않아서 그렇지요. 누가 물으면 i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종일 날이 궂더니 저녁 무렵부터 비가 내렸다. i는 퇴근길에 술을 사들고 들어왔다. 그런데 맥주 한 병을 다 마시기도 전에 '그것'이 찾아왔다. 보통은 직장에 있을 때 찾아오는 그것. 맘이 좀 편해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찾아와 속을 어지럽히는 그것. 그것이 찾아오면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갑자기 낯설어지면서 숨을 조여오곤 했다.
'그것'이 처음 찾아왔을 때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걸로 i는 기억한다. 다락방에 숨어 세계공포문학전집을 읽고 있던 때였다. 책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으나 그때 i가 본 것은 거울 속에서 자신과 다르게 움직이는 또 다른 자신을 대면하고 공포에 질린 어떤 얼굴이었다. 이후로 내내 잊히지 않는 그 얼굴이 거울 밖의 주인공이었는지 거울 속의 주인공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억이 그렇듯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매번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니 말이다. 여하튼 그것은 스토커처럼 i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i의 사고체계가 흔들리거나, 주변 상황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흘러가거나, 혹은 i의 생각이나 감정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불현듯 찾아왔다. '그것'이 찾아오면 평소 안정되게 여겼던 세계가 불안해지고,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지고, 누구를 만나도 어떤 일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그것'에 대하여 한번은 자주 가는 서점주인 C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C는 진지한 눈빛으로 끝까지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단골손님에게 베푼 친절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였는지 그 때는 '그것'이 수월하게 지나갔다. 큰 동요 없이 별다른 실수도 없이.
그런데 이번의 '그것'은 이전의 것들과 달랐다. '그것'의 얼굴이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꿈에도 계속 등장하는 '그것'을 따라가다 보니 멀미가 났다. 꿈이 하도 고단해서 하룻밤에 서너 번을 깼다. 지치도록 걸어 다녀도 정신 줄을 놓을 만큼 술을 마셔도 '그것'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해야 하나 싶었을 때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얇은 책이었는데 책 표지가 이상했다. 제목도, 저자 이름도, 출판사 이름도 없었다. 표지를 넘기니 책의 내지라 보기 어려운 페이지들이 나타났다. 글자들이 드문드문 인쇄되어 있었다. 간혹 문장의 형태를 갖춘 것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이 빠진 모양새라 무슨 내용의 책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나서지 않았다면 바로 집어던졌을 책이었다.
i는 연필을 들고 빈 곳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시자처럼 i의 어깨 너머에서 지켜보았다. i는 글자에서 글자로, 이쪽 페이지에서 저쪽 페이지로, 그리고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나들며 책을 써나갔다. 처음에 무거웠던 어깨가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누르는 힘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채우고 i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새벽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알람이 울렸다. 책을 책장에 꽂아놓고 창문을 열었다. 비 온 뒤의 상쾌한 공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나타나 당황하게 만들겠지만 머지않아 ‘그것’이 영영 오지 않는 날이 올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i의 숨이 모처럼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