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독서 모임을 이끌고 있는 R은 올해의 마지막 모임에서 함께 토론할 책을 읽고 M 도서관으로 향했다.
전날 쌓인 눈으로 거리는 미끄러웠다. 하늘에 달도 없는 밤이었으나 쌓인 눈에서 나오는 빛으로 길은 어둡지 않았다. 동네 제과점에는 아직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에 뭘 했더라, R은 지난 며칠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지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해 읽기로 했던 책들을 쌓아놓고 읽느라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지냈는데 욕심이 과했던 건지 읽어야 할 책이 아직도 몇 권 남아 있었다.
<안데르센 교수의 밤>은 서점 주인 C가 추천한 책이었다. 모임에 가려면 우선 이 책부터 읽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이 가지 않아서 맨 위에 있던 책이 다른 책들에 밀리고 밀려 결국 제일 아래 칸에 내려가 있던 것을 이제야 다 읽은 것이다.
책을 읽고 있는데 모임의 다른 회원한테 전화가 왔다. 다 읽으셨느냐, 지금 읽고 있다, 재미있으신가, 모르겠다, 너무 현학적이지 않은가, 아무튼 깊이는 있는 것 같다, 교수는 왜 신고를 안 하고 고민만 하고 있는 건지 답답하다, 그래도 교수의 생각을 따라가며 읽으니 읽을 만하다.... 전화를 건 회원은 교수의 머릿속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 같았다. 실은 R도 그랬다. 그래서였는지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밖에 나가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한 번 나가면 다시 책을 집어들 것 같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읽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몰입이 되기 시작했고 저녁때쯤 책장을 덮고 나니 휴~하고 깊은숨이 내쉬어졌다. 이제는 산책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아직 올해 읽을 책들이 남아 있었지만 숙제를 마친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처음부터 M 도서관에 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왠지 오늘 밤엔 뜻밖의 책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발길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기대와 달리 서가 탐색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다. 신간이나 찾아볼까 싶어서 디지털 자료실로 들어갔다. 서점 사이트에서 신간을 훑어보는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 자료실 어디선가 꺽꺽 대면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몹시 거스르는 소리였다. R은 참고 참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찾기 시작했다. 소리는 동영상 좌석에서 났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노래자랑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노인은 편안한 표정이었다. 몸이 딱히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노인은 호흡할 때마다 꺽꺽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일부러 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소리에 신경을 꺼야지 생각하면서 다시 책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소리는 더 거슬렸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검색을 하는데도 소리는 계속 들렸다. 심지어 소리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아서 자꾸 노인이 있는 쪽을 힐끔힐끔 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책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나중엔 숨이 꺽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순간 벌떡 일어난 R은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다. 이용자가 벌떡 일어나자 순간 놀란 직원도 자리에서 일어나 무슨 일인지 살피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R의 입에서 말들이 터져 나왔다. 저기 저 꺽꺽대는 소리 뭐죠? 너무 신경이 쓰여서 그러는데 한번 가 봐주시겠어요? 하면서 R은 동영상 좌석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좀 무례하지 않아?라고 R의 왼쪽 귀 뒤에서 선의의 속삭임이 들렸지만 이미 R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 오른쪽 귀 뒤의 노이로제는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직원은 벌겋게 된 R의 얼굴을 보더니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직원이 노인의 좌석으로 가고 있는 동안에도 꺽꺽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직원이 마침내 노인 옆으로 갔는데 이상하게도 R이 기대한 행동은 하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직원은 R에게 다가와, 여기 자주 오시는 분인데 호흡이 조금 불편하세요. 일부러 그러시는 거 아닌데 양해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말한다. R은 할 말을 잃었다. 불편한 소리를 참거나 포기하고 가거나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문제는 R이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기 싫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자료실 안에서 온갖 종류의 불쾌한 소리가 일제히 R을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기침 소리, 킁킁대는 소리, 훌쩍대는 소리,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 때마침 터져 나온 재채기, 따각 따각 손가락으로 책상을 치는 소리, 다리 떠는소리, 볼펜 딸각거리는 소리, 사각사각 종이에 연필 긋는 소리, 겨울옷을 여밀 때 나는 사르륵 소리, 발자국 소리, 의자 끄는 소리... 동시에 자료실 전체가 뿌옇고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연기는 동그랗게 동그랗게 말리더니 단단한 공처럼 모아져 R을 문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몸집이 단단한 R이었지만 공의 힘에는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R은 문밖으로 튕겨져 나왔고 그의 등 뒤로 자료실 문이 닫혔다. 아, 그런데 그 소리,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는 여전히 나는 것이 아닌가. R은 양쪽 귀를 막고 도망치듯 도서관을 나왔다.
하얗게 빛나는 거리는 고요했다. 그렇게 늦은 밤도 아닌데 동네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R은 귀를 막고 있던 손을 풀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온갖 소음이 멎으니 살 것 같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으로 들어서는데 동네 서점의 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문 닫을 시간이 지났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서 서점 쪽으로 걸어갔다. 서점 안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제야 음악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서점 간판에 박힌 <Null Island>라는 글자가 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의 뒷모습이 매우 낯익었다. 가까이서 보려고 창가 쪽으로 한 걸음 더 옮겼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음악이 멎었다. 그리고 R의 숨도 멎었다.
허걱, 하고 책상 위에서 번쩍 깨어난 R은 새해에는 독서 목록을 좀 줄여야겠구나, 생각했다. 펼쳐놓은 책의 글자들이 꼬물꼬물 몰려오는 느낌이 들면서 소름이 끼쳤다. 책만 보며 사는 건 역시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