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에는 토끼가 산다. 반짝이는 눈으로 열심히 찾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토끼. K는 제 눈에만 보이는 그 토끼를 프리실라~라고 부른다.
<달의 궁전> 바로 옆에는 작은 편의점이 있다. K가 밤샘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이다. 흐리고 습한 월요일 저녁이어서인지, 이른 저녁부터 술집 <달의 궁전>은 만석이다. 체취에 술 냄새, 안주 냄새가 범벅이 된 열기를 피하고 싶은 손님들을 위해 테라스에도 테이블 두 개가 차려진다. 취기에 점점 커지는 목소리들이 얇은 벽을 타고 편의점으로 넘어온다.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점주는 낮의 아르바이트를 내보내고 하루 종일 편의점을 지키기로 했고, 저녁 9시부터 새벽 5시, 잠을 자야 하는 시간에만 K에게 매장을 맡겼다.
술집 옆 편의점은 대체로 가벼운 2차의 장소가 된다. 맥주 캔을 사들고 나가 편의점 테라스에서 한 두 시간 마시다가 헤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그 자리가 새벽 첫 차를 기다리는 이들이 밤을 지새우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편의점 옆 술집의 테라스와 편의점의 테라스는 취기의 농도가 다르다. 이야기의 밀도도 다르다.
편의점에서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서야 술집 간판이 K의 눈에 들어왔다. <달의 궁전>이라니. 간판에는 창백한 초승달이 살짝 걸쳐 있다. 술집 내부는 본 적이 없다. 앞의 아르바이트를 마치자마자 헐레벌떡 뛰어와서 9시부터 편의점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편의점에 손님이 없을 때 눈을 감고서 벽을 타고 넘어오는 웅웅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도 달의 궁전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프리실라는 <달의 궁전> 단골인 그녀의 세례명이다. K는 첫 출근 하던 날 편의점 테라스에서 과자 상자들을 정리하다가 프리실라를 처음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프리실라, 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세례명이 예쁘네요, 라고 말하는 소리까지 듣지 않았으면 무슨 카페 닉네임이겠거니 생각했을 것이다. 이야기 하는 쪽은 언제나 앞의 남자였다. 그녀는 대개 듣고만 있었다. 가끔 미소를 짓거나 이마를 살짝 찡그리거나 하는 정도의 반응을 하면서. 대화라기보다는 남자의 수다를 내내 들어주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한두 시간 수다를 떨다가 남자는 편의점 앞으로 대리기사를 불렀고, 대리기사와 남자와 여자는 함께 주택가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면 프리실라는 K의 토끼가 되어 <달의 궁전>에 다시 나타난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달의 궁전>에서 K는 프리실라와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도 자기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온다. 왜 직장을 그만두었는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속에 묻어 두었던 서운하고 답답한 이야기까지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동안 그녀는 K의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편안하다. 손님이 재차 부르는 바람에 놀라서 깨고 나서야 꿈인 것을 알았다. 꿈에서도 그녀의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했구나 생각하니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술을 마시던 남자는 그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K는 다음에 두 사람이 <달의 궁전>에 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잘 들어보기로 했다.
1주일 후 <달의 궁전> 테라스 자리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 편의점 테라스 정리를 하는 척 하면서 K는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지나온 삶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녀가 중간 중간 조심스럽게 하품을 한다. 잘 나가던 시절을 지나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그녀가 남자의 말을 거든다. 중간 톤의 울림이 좋은 목소리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남자가 묻는다. “그때 저도 '그곳'에 있었어요.” 아, '그곳'! K는 그녀의 말이 더 이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입을 다문다. 남자는 더 묻지 않는다. 다시 남자의 수다가 이어진다. K는 화가 올라오는 걸 느낀다. 남자는 더 물어봐야 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야 하지 않는가. 왜 혼자 떠들고 있는가.
K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을 멈추고 매장 안으로 들어간다. 더 듣고 있어봐야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이야기는 나올 것 같지 않아서다. 그렇다면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물어봐야지. K는 그녀가 혼자 있을 때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스마트폰 구글 앱을 열어 '그곳'을 검색한다. 표정이 맑은 여자다. 그녀는 '그곳'에서 무엇을 했고, 어떻게 지금의 그녀가 되었는지, 알고 싶다.
두 사람은 12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자리를 뜬다. 두 사람이 떠난 테라스가 텅 비어 보인다. 새벽 공기에 습기를 머금은 땅 냄새가 배어 있다. 편의점 건너편 서점은 불이 꺼져 있다. 자세히 보니 서점 안쪽에서 불빛이 흘러나온다. 서점주인 C가 서점 안쪽에서 책이라도 보고 있는 모양이다. 맥주병을 앞에 놓고 책을 읽고 있는 서점주인 C의 모습이 그려진다. K는 조용한 새벽의 거리를 비추는 <달의 궁전>의 초승달을 올려다보면서 그의 토끼를 생각한다. 어쩌면 프리실라가 있던 '그곳'에 나도 있었는지도 몰라, 라고 중얼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