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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탁소리 Mar 18. 2021

#6 멀고도 가까운

  아이는 다락방에 있었다. 다락방 창문으로는 하늘이 보였다. 옆 집 키 큰 나무도 거기까지는 올라오지 못해서 하늘만 보이는 창문. 아이는 작은 창문으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책. 책이 있었다. 아이가 사랑한 것이 다락방이었는지, 하늘이었는지, 책이었는지는, 성인이 되어서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아이에게 필요했던 모든 것이 있었던 그 시절은 슬프게도 짧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조금씩 사라졌고, 나중에는 슬픔만 남았다.       

  한 때 아이였던 P는 시인이 되었다. 1년에 한 두 편 밖에는 쓰지 않는 과작의 시인.  P는 단어를 떠올리고 종이에 적고 다듬는 시간에만 자신이 온전히 존재함을 느꼈다.     

  시인 P는 동네 조그만 식당에서 일했다. 홀에서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고, 카운터에서 계산도 했다. 얼마 전 부터는 김밥 마는 일도 하고 있다. 김밥 마는 김씨 아주머니가 결근을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맡게 된 일이었는데, 그 날은 왠지 일다운 일을 한 것 같아서 기분 좋게 퇴근했다. 집에 돌아온 시인 P는 '김밥'이라는 시를 썼다. 아니,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잠이 들었다. 시 제목이 '김밥'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자다 깨서도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시인 P는 김밥을 잘 만다고 칭찬을 들었다. 이 식당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눈물이 찔끔 나는 걸 얼른 훔쳐냈다. 그리고 마치 양파 때문에 매워서 그런 양, 에구 오늘 양파는 맵네요, 라고 쓸데없는 말을 했다. 식당 영업을 마치고 주인이 싸준 남은 김밥 두 줄을 앞에 두고 시인 P는 다시 시어를 가다듬었다. 제목이 '김밥'이면 어떤가. 낮에 김밥 때문에 흘린 눈물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보니 김밥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런 것이 아름다움인 것이다.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도 있다지만 실은 세상의 많은 시인들은 밥 때문에 죽는다. 그게 김밥이라면 조금은 새로운 거 아닌가, 라고 시인 P는 생각했다.      

  이런 저런 생각만 하다 또 한 밤이 지나갔다. '김밥'이라는 시는 지난밤에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몇 번은 시의 제목을 바꾸려는 시도도 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처음 지은 제목이 낫지 싶어 제목은 그대로 '김밥'인 채로 미완의 시는 종이만 먹어치웠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매서운 한파가 시작된 어느 날, 시인 P는 백수가 되었다. 식당 바로 옆집에 인테리어를 멋지게 하고 들어온 브랜드 김밥집이 열리면서 식당의 매출이 급감했다. 주인인 요리사와 주인의 오랜 지인인 김씨 아주머니가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인 P는 백수가 된 것이 슬픈 것인지 이제 더 이상 김밥을 말 수 없게 된 것이 슬픈 것인지 헷갈렸다. 백수가 되어 집에 돌아오니 문 앞에 택배물이 놓여 있었다. 어제 주문한 책 <멀고도 가까운>. 포장을 풀고 아무 페이지나 넘겼는데, 돌무더기 사진 옆의 글이 눈에 들어 왔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울리는 것 중 하나이며따라서 아름다움은 늘 눈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눈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순간 눈물인지 콧물인지 뚝 떨어졌다. 얼른 책을 덮고 보일러를 켰다. 뭔가 이상했다.  집안에 냉기가 가득했다. 보일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면서 삐리삐리 소리를 내는 보일러를 아예 꺼버리고 시인 P는 옷을 다 입은 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휴대폰 메모장을 열고 '김밥' 시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메모장 속에서 떠는 것처럼 보였다. '너도 추운가 보구나.'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단어들이 눈물 속을 떠다녔다. 눈물은 뜨거웠고 시인 P는 단어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건져 올려 시를 지었다. 먹을 수 없는 '김밥', 그러나 P의 하룻밤 정도는 데워줄 수 있는 시를.    

  #7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그의 뒷모습은 서늘했다. 큰 키에 마른 몸은 늘 조용히 움직였다. 발걸음 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최소한의 땅만을 딛겠다는 듯이. 걷는다기보다는 바닥을 점처럼 찍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마지막 직장에서 뛰쳐나온 때가 10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그는 세상에서 물러난 사람처럼 홀로 지냈다.      

  이웃들 말로는 학벌도 좋고 일머리도 있는 사람인데 조직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한 직장에서 1년을 버티지 못했다. 직장을 그만둘 때마다 그가 하는 말은 똑같았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서점주인 C는 한 번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건가요?”

 “없어요.”

 “......”

 “그저...견딜 수가 없는 거죠, 이 세상이라는 게,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10년 동안 직장도 없이 그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점 2층에 사는 그를 서점 입구에서, 가끔은 서점 안에서, 몇 번 마주쳤을 뿐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와 친구가 되기는 어려웠다.  그런 그에게 변화가 생긴 건 지난 가을이었다. 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졌고, 어딘가 목적지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거의 매일 외출을 했고 밤늦게야 돌아왔다. 어깨에는 커다란 가방을 매고 허적허적 집을 나서는 그의 행선지가 궁금해서 하루는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요즘 어디 다니시나 봐요?”

  “공부를 좀 해보려고요.”     

  무슨 강의를 들으러 다니는 모양이었다. 무슨 강의를 듣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의 외출은 유독 추웠던 겨울까지 이어졌다. 새해가 왔고 입춘 날, 서점 문에 입춘방을 붙이고 있는데 그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가방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 그는 가방 없이 서점 앞을 지나갔다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서점주인 C는 햇빛을 즐기느라 문 앞에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그와 마주쳤다. 얼굴 표정이 굳어 있었다.      

  “요즘은 공부하러 안 가시나 봐요?”     

  “때려치웠어요. 다 쓸데없는 짓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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