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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탁소리 Mar 18. 2021

#10 변경

  익숙한 것들은 위험하다. 너무 편안해져서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하면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잡아먹힐 것 같은 느낌. 자기가 사라지는 느낌. 옴짝달싹 못하게 잡힌 느낌.       

  모임의 분위기는 언제나처럼 좋았다. 편하게 책 이야기를 나누는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독서토론 모임을 주도하는 R이 꽤 길게 책의 개요를 정리한 다음 돌아가면서 소감을 나누는데 그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것에서 나는 냄새. 바로 뒤돌아서 도망가고 싶게 만드는 냄새. 너무 아무것도 아니어서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리는 냄새. 그 냄새와 함께 사람들 소리가 웅얼대는 소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분별이 되지 않아 시끄럽기만 했다.       

  그가 벌떡 일어섰다. 한참 무슨 말인가를 하던 R이 놀랐는지 하던 말을 중단하고 그를 쳐다봤다. 모임에 온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로 향했다. 순간 응축된 냄새를 견딜 수 없게 된 그는 고개를 꾸벅 떨구고는 문을 열고 나왔다.     

  초봄의 바깥 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 불안했던 발걸음이 천천히 리듬을 되찾았다. 그리고 계획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모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네를 몇 바퀴 돌며 계획을 세우고 그는 집으로 향했다.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지 허기가 몰려왔다.  동네 백반 집으로 들어갔다. 식당 주인은 평소처럼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그도 인사를 하려는데 어디선가 냄새가 올라왔다. 식당 주인은 얼마 전 그가 몸살에 시달렸던 걸 기억하고 걱정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리들이 뭉쳐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겨우 웃으며 네, 네, 감사합니다, 등등의 말로 대꾸를 했는데 이날따라 식당 주인의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살짝 구토가 날 것 같다고 느낄 때 쯤 다행히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그는 전화 걸 곳이 생각난 것처럼 핸드폰을 들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찬 공기를 쐬면서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서 계획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밥을 서둘러 먹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 현관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그 냄새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 냄새는 작은 방에서 나는 것 같았다. 거의 열지 않는 작은 방을 열었다. 이사올 때의 짐 거의 그대로 쌓여 있는 작은 방은 견딜 수 없는 냄새로 가득했다. 그는 핸드폰 메모장을 열고 계획 하나를 더 추가했다.       

  샤워하고 침대에 누워 요즘 계속 세우고 있는 계획들 중에 무엇부터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생각했다. 계획 하나를 세우면 다른 계획이 계속 따라붙었다.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냄새가, 다시 그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지만 정신은 점점 말똥말똥해졌다. 눈앞에 계획들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빙빙 도는 계획들이 서로 뭉치면서 점점 단단해졌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냄새들이 버무려진 채로 그의 몸을 조여 왔다. 숨쉬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문제였구나. 그래, 이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몸을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 덩어리들을 떼어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는 며칠 째 세워둔 계획들을 하나씩 변경하기 시작했다. 계획들이 조금씩 가벼워지다가 의도로 짜인 형태가 사라지자 덩어리들이 풀어졌다. 몸이 풀리니 노곤해지면서 잠이 찾아왔다.      

  이날 밤 그는 계속 차를 바꿔 타는 꿈을 꿨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작은 방 문을 열고 짐을 치우기 시작했다. 주말의 시간은 길었고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종이 상자를 묶어놓은 테이프를 잘라내고 안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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