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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탁소리 Mar 18. 2021

#9 굴드의 물고기 책

   비행기가 작아서 그래요. 옆 좌석의 할머니가 낮은 소리로 소곤대면서 안심하라는 눈짓을 보낸다. 유난히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크프우프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곧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오자 크프우프크의 표정이 조금 풀리기 시작한다.  창 아래로 바다가 보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처럼 바다를 눈에 가득 담은 다음 크프우프크는 눈을 감는다. 기체의 심한 흔들림, 엄청난 소리, 귀가 찢어질 듯 아프다. 그리고 쿵. 비행기 밖으로 나오자 상쾌한 바람에 두통이 사라진다. 바다 냄새에 기분도 좋아진다. 짐을 찾고 공항 밖으로 나오고서야 목적지도 숙소도 잡지 않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고향 가까이 온 것이었는데 딱히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육지에서 크프우프크는 성공한 작가였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천재 작가. 신비주의. 출처를 알 수 없는 묘한 소문들. 크프우프크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뿌연 구름 속에 숨어서 끝도 없고 한계도 없는 허구의 세계를 즐겼다.  아무도 그의 얼굴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책 밖의 세상에서도 자유로웠다. 허구의 세계가 만들어준 재력 덕분에 그는 현실에서도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었다.  딱 한 가지, 누구에게도 진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 말고는.      

  그것이 그렇게 힘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항상 가면을 쓰고 사는 것처럼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작가로서 절정에 올랐다는 평을 들은 5년 전 부터였다. 이야기를 잘 나누다가도 어느 시점에서는 발을 빼야 했다. 더 나갔다가는 본색이 드러나니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친구들과 대화하는 중에도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는 또 하나의 피부처럼 그의 정체를 덮었다. 이야기의 겹이 덧씌워질수록 호흡이 힘들어졌다. 피부에 종기가 나고, 멍도 생기고, 처음엔 가렵기만 하더니 나중엔 참을 수 없이 따끔거리기도 했다. 피부과에서는 원인을 못 찾겠다고, 요즘 스트레스가 많으신 모양이라고 말했다. 먹는 약과 바르는 연고를 처방해주긴 했지만 부작용인지 구토만 올라올 뿐 효과는 없었다.      

  그를 보호해주었던 하얀 구름이 회색 감옥이 되었다. 애초에 왜 구름 속에 숨는 걸 선택했는지 후회스러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크프우프크는 구름 속 세상에서만 온전히 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고생하던 어느 날 술자리에서 해수탕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그의 심장이 빠르게 반응했다.  크프우프크는 바다를 떠나오게 된 그 날을 20년 만에 떠올렸다.      

  바다에서는 다른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았다. 바다에서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 숨 쉬고 먹고 자고.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고 매 순간 평화로웠다. 어느 날, 바다의 존재와는 너무나 다른 그것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소중해지고, 잃고 싶지 않게 되고, 그래서 바다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그 이질적인 존재가 난데없이 바다로 가겠다며 사라진 그 날이 오기 까지는. 그렇게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사실은 그의 마음 속 바다에서 커다란 물고기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크프우프크는 육지를 떠나기 전날 밤 극심한 복통을 겪으며 깨달았다. 온 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운 밤을 보낸 그는 간소한 여행 가방을 들고 작업실을 나섰다.       

  자기를 바다로 실어다 줄 작은 비행기를 올려다보는 크프우프크는 이것이 오래 묵은 이야기의 끝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의 안에 머물기에는 너무 크게 자라버린 물고기는 바다로 가는 이 이야기의 서두에 적잖게 설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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