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는 케냐 AA를 골랐다. "그건 좀 실텐데." "상관없어. 커피가 다 거기서 거기지." 케냐 AA라면 아이스커피로 마시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B는 역시 상관없다면서 따뜻한 커피로 주문했다.
일요일 아침 카페 <하루>는 꽤 붐볐다. 운 좋게 남아 있던 창가 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B와 그녀는 노트북으로 영화를 봤다. 천만 관객 신화를 달성했다는 영화였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그런 볼거리에 불과했다. 영화보다는 커피 맛을 음미하면서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더 좋았다.
휴일의 시간은 평일과 달리 느슨하고 몽롱하게 흘러갔다. 케냐 AA를 마시는 B를 보면서 그녀는 아주 오래 전 어학 연수중에 만난 케냐의 까만 소녀를 생각했다. 눈이 얼마나 크고 맑던지 얼굴에 검은 호수가 박혀 있는 것 같았는데. 그때 이후로 다시 만난 적은 없지만 커피 메뉴에서 케냐 AA가 눈에 들어 올 때마다 소녀의 검은 호수 같은 눈이 떠올랐다. B가 지난 해 시애틀 출장을 떠날 때도 그녀는 시애틀의 스타벅스에 꼭 들르라고 당부했다. 출장을 다녀온 B가 면세점에서 산 화장품을 선물로 내밀었을 때 그녀는 실망한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혹시 선물을 주고 싶으면 시애틀의 스타벅스에 있는 물건이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을 B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잊었을 것이다.
그녀가 유달리 커피나 커피전문점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휴일 커피 집에서 흐르는 시간이었다. 재즈 선율이 흐르는 커피 집에서, B의 표현대로라면, 따뜻하고 까만 물을 마시며 보내는 몇 시간은 그녀에게는 일종의 휴일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 시간 속에는 온 세상이 다 들어있는 것 같았다. 세계 각지에서 온 커피와 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들, 찻잔과 에스프레소 머신을 비롯하여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식기와 기계들, 그리고 멀리서 온 음악과 커피 집에 모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생각과 다채로운 느낌들.
혼자 올 때 그녀는 항상 사각의 높은 탁자를 선택해서 앉는다. 운이 좋으면 4인용 탁자를 혼자 차지할 수도 있고, 아니면 8인용 탁자의 한 귀퉁이에 앉아 몇 시간을 머무르다 오는 것이다. 책을 가지고 나올 때도 있지만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부터 책은 집에서와는 다른 향기와 의미를 가진 사물로 바뀌곤 한다. 바로 이 공간을 이루는 사물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영화는 두 시간이 훨씬 넘어서야 끝이 났다. B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괜찮았지?'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끄덕끄덕. 그리고 들키지 않을 만큼의 어색한 웃음. B의 커피 잔에는 커피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뭐 먹으러 갈까?" "아무거나." "그러지 말고 말해봐. 모처럼 외식인데." "난 다 좋아." "나가자 일단."
두 사람이 나가자, 옆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이 자리를 옮겼다. 투명한 창은 안 쪽 공간의 두 사람과 막 바깥세상으로 나간 두 사람 사이를 날카롭게 갈랐다. 문이 열리면서 바깥으로 새어나간 재즈 선율은 이내 도로의 소음에 묻혔다. 커피 집 안은 늦은 오후가 되면서 빈 공간이 늘어났다. 음악 소리가 상대적으로 커졌고 사람들의 대화 소리는 줄어들었다.
K는 캐모마일 티를 골랐다. K는 캐모마일 티를 마실 때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떠올린다. 어릴 적 읽은 그의 소설에서 눈에 띄었던 이국적인 차가 바로 캐모마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K가 캐모마일 티를 마실 때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도 같이 마시는 셈이다. 향긋하고 편안한 캐모마일 티는 격렬하고 어두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인들은 말했지만, K가 캐모마일 티를 마시는 의식은 건드리지 못했다.
오늘의 <하루>에서는 그녀와 K가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일주일 후 <하루>는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을 만들어낸다. 먼 나라에서 <하루>의 탁자 위까지 찾아 온 커피콩과 캐모마일이 두 존재를 어떻게 하나의 세계로 엮어내는지는 다음 주 <하루>를 찾아오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