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전 뒤피, 행복의 멜로디> 전시 리뷰
라울 뒤피를 만나러 '더 현대 서울'로 향했다. 더 현대 서울은 가장 핫한 팝업이 입점하고 패션, 전시, 엔터테인먼트 등 트렌드를 이끄는 콘텐츠로 가득한 곳이다. 그렇다면 MZ들의 성지라 불리는 이 공간에 라울 뒤피의 작품이 왜 전시된 것일까?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라울 뒤피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퐁피두센터(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다. 그리고 이 퐁피두센터를 건축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 Richard Rogers’가 더 현대 서울을 설계했다. 더 현대 서울과 퐁피두 센터가 만난 첫 번째 프로젝트가 바로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전 뒤피, 행복의 멜로디>인 것이다.
비가 오는 주말 오전이었지만, 더 현대 서울의 명성 덕인지 라울 뒤피의 작품 덕인지 사람들은 복작거렸고 그 인기를 실감하며 그의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들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전시의 도입부 라울 뒤피의 소개와 초상화를 볼 때 드뷔시의 '달빛'이 흘러나와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행복의 멜로디"로 라울의 긍정적인 예술을 담았고, 뒤피는 삶과 작업 방식에 음악을 많이 내재시키고 있었다. 그와 다른 시대에 같은 음악을 듣고 있자니, 라울 뒤피의 시선으로 작품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작품은 자화상이다. 1898년, 1920-25년, 1948년 각각의 시기에 그린 자화상을 만날 수 있는데, 전혀 다른 세 화풍의 자화상이었다.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의 화풍이 각기 다른 시기의 자화상에서 보였다. 이를 보고 느꼈다. "아! 자유로운 예술가구나." 라울 뒤피는 어느 한 가지 화풍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화풍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였다. 그는 다양한 화풍을 모두 익히고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1877년부터 1953년까지의 생애를 거쳤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인물이다. 그렇지만 여느 화가들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공격을 받아 피난을 가거나,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는 등의 큰 고통을 받지 않으며 나름 평탄하게 두 전쟁을 잘 넘어갔다. 이러한 평탄함과 보통의 삶이 '그를 행복의 그림을 그리도록 만든 것일까' 생각했다.
곧이어 그가 거쳐갔던 화풍들을 주제로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다.
뒤피는 클로드 모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초기의 그림들은 거의 흡사하다고 봐도 될 정도로 전형적 이 시기엔 인상주의의 화풍을 그렸다. <마르티그의 항구>를 보면 빛의 효과에 대한 표현을 살리고자 했고, 양감의 표현이 두드러졌다.
"화가가 자신의 색채로 빛을 담아내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그리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이해하도록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색채가 아닌 빛에 의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만족을 못한 뒤피는 색채실험에 매진을 했다. 야수파는 주관적 판단에 따라 재해석을 하는 화풍이었으며 뒤피는 단숨에 그 표현에 매료되었다.
뒤피는 앙드레 드랭과 앙리 마티스의 영향을 받고 강렬한 색채의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가장 큰 특징으로는 윤곽선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원색을 쓰는 뒤피의 취향까지 합쳐져 더욱 강렬한 그림이 완성이 됐다.
"내가 말하는 색채란 본연의 색채가 아니라 물감의 색. 즉 화가의 언어를 이루는 단어와도 같은 팔레트 위의 색채를 뜻한다"
인상주의에서 색채를 보는 생각이 변화한 걸 알 수 있다. 인상파에서 색채는 빛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었다면 야수파 뒤피는 화가의 주관적 의견이 들어간 것이 색채라고 정의했다.
폴 세잔의 작품에 감명을 받은 뒤피는 폴 세잔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브라크의 건축적인 간결함을 접하면서 뒤피는 색의 사용을 현저해 줄이고 간소화된 표현을 하려 했다. 오직 오렌지빛 갈색과 녹색만을 그림에 그릴 뿐이었다. 브라크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의 작품과 비슷하지만 추상적 표현을 줄이고 장식적인 면이 더 두드러진다.
"예술작품은 늘 잘 짜여진 계획에 따라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품을 구성하는 데에 필요한 논리 정연함에 대한 열망, 그리고 모든 예술가들에게 잠재하는 무질서와 혼란에 대한 이끌림. 그 둘 사이의 투쟁으로부터 탄생한다고 볼 수 있다."
삽화 목판화 묘사 뒤에 단순화된 형태로 동물들을 표현했다.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애국심을 담은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종교와 군대를 위한 교훈적인 그림이었다.
그는 아폴리네르 시집의 삽화를 의뢰받았는데, 각각의 내용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렸으며, 안 어울리는 그림 또한 그렸다. 텍스트와 다른 이미지 그림을 그려 일치 혹은 불일치를 만들어내었다. 이는 책을 흥미롭고 생생하게 만들어주었다. 갇혀있는 사자의 내용에선 위풍당당한 사자를 그리는 식이었다. 또한 그는 코끼리 작품을 많이 그렸으며, 그 주인공을 숨은 그림처럼 교묘히 숨겨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하는 재미까지 더했다.
삽화는 목판화로 제작하였는데 이는 흑백의 풍성한 장식을 그려넣었다. 이로써 뒤피는 자신만의 특징과 개성을 살린 또 하나의 뒤피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는 신문, 삽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작업 활동을 하며 다양한 예술 범위를 넓혀나가며 성장했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이 당시의 그림은 모든 화파가 모두 보일 정도로 그의 화풍이 융합이 잘 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물을 든 어부"라는 그림에선 강렬한 색감과 추상적인 표현 등이 합쳐져 아름다운 작품이 완성됐다.
"판화를 하면서 목판화 도구를 이용한 기초적인 방법만을 가지고도 조형적이면서 장식적인 아름다운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당시 뒤피는 여성 패션 디자이너인 푸아레에게 영감을 받았다. 그와 함께 장식 작업을 하게 된 뒤피는 작은 공장에서 인쇄 작업을 하게 된다. 자기 자신이 그냥 브랜드가 된 것이다.
뒤피는 예술의 서열화된 관행을 무시했다. 회화 화가는 오직 회화만 그리는 것이 위상에 맞는다는 관행을 보란 듯이 깨버리고 도자기, 태피스트리, 일러스트, 광고, 벽보 등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이어나갔다.
모든 것을 시도한 예술가였다. 모든 화풍에 제약을 두지않고 도전했고 흡수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익혔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 안에서 융합되어 다시 뿜어져 나왔다. 뒤피가 사용할 수 있는 재료는 더욱 다양해졌고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만능 예술가가 되었다.
"한 시대의 취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예술가들이고, 대부분의 장식가들은 예술가를 따라갈 뿐이다. 오늘날의 장식가들은 야수파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강렬한 색채 변형 아라베스크 문양에 대한 취향이 장식화와 벽면 장식에서 두드러진다."
결국 뒤피는 뒤피 스타일을 구축해낸다. 시대에 영향을 주는 화파가 있으면 뒤피는 그것을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내재화했다. 전시가 끝날 즈음 되니 회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업물들도 시도해 보고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밸런스 또한 잘 맞췄던 뒤피는 트렌드에 민감한 예술가라고 느껴졌다.
그의 초기 작품은 이전에 있던 화풍을 따라 하고 배운 것이었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내다 보니 이제는 뒤피만의 새로운 화풍이 생겼다. 참신한 색채와 자유로운 선의 활용 등이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외양이 아니라 그 실재의 힘을 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형식의 정립보다는 연구와 분석을 더 선호해왔다. 탐구의 즐거움을 주변 이들과 나누고 싶어 했다. 뒤피는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림을 그렸다. 보이는 것만 그린 것이 아닌 그 사물의 내면의 힘을 그려냄으로써 뒤피는 사물의 본질에 조금 더 나아갔고, 깊이 있는 영감을 줄 수 있는 예술가가 되었다.
뒤피의 선을 넘는 자유로운 유연성, 뒤피 스타일이라 불리는 독창적인 화풍, 화가의 직업을 넘어선 다양한 시도들을 보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영감과 시대를 보는 눈, 다양한 분야를 자유롭게 시도해 보는 용기를 얻어 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