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작가님 소설반 글쓰기 숙제 - 9 (나만의 비유적 에세이 쓰기)
작년 겨울, 산후 검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맞은편에 앉은 그녀에게 눈길이 머물렀다. 깔끔한 흰 니트와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검정 치마를 입은 모습. 옅은 갈색 코트는 반으로 접어 무릎에 올려 두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는 한 올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정한 실루엣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신발이었다.
붉은 구두는 티 하나 없이 반들반들했고, 빛이 났다. 곧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언제 샀는지도 모르는 두툼한 잠바를 다시 입고, 감지 않은 머리를 숨기기 위한 모자도 고쳐 썼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밋밋한 나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신고 다니는 하얀 운동화. 여기저기 쓸린 새카만 자국이 평소보다 후줄근하게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냅다 신발장을 열었다. 뭐 하냐는 남편의 물음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가지런히 놓인 신발들을 살펴봤다. 끈이 너덜너덜해진 운동화와 뒤축이 닳은 슬리퍼가 몇 켤레 보였다. 빛나는 하이힐은 없었다.
나도 예전에는 구두를 신는 사람이었다. 날마다 현관문에 서서, 입고 있는 정장에는 어떤 게 어울릴지 이것저것 꺼내며 고민했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우아하게 출근하고 앞으로만 달리던 그때. 불과 몇 년 전인데도 왠지 까마득했다.
그날 밤, 잠든 아이 옆에 한참을 누워있었다. 밤마다 늘 즐기던 맥주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어둑한 천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니,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나 자신은 티끌처럼 작아졌다. 급기야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순간일 것 같았던 감정은 매일 같이 지속되었고, 집에는 캄캄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떻게 하면 이 늪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처절한 고민을 시작했다.
엄마를 만나 집에서 애만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다. 나를 안쓰럽게 보는 눈동자를 보니, 괜한 걱정을 시킨 건 아닌지 죄책감이 밀려왔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친구들을 만났지만, 그저 잠깐의 즐거움일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에 꽉 들어차 사라지질 않았다. 시커먼 우울감을 좀처럼 견디기 어렵게 되었을 때, 나는 볼펜을 꺼냈다. 흰 종이가 새까맣게 되도록 거친 숨을 내뱉으며 글자를 토해냈다. 다음날, 그다음 날도. 문법이나 맥락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휘갈겼다.
삐뚤삐뚤한 글씨가 늘어진 모양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문장에 쉼표와 마침표가 찍히는 것처럼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가 되었고, 언젠가부터는 줄을 맞춰 단어를 적었다. 다음 날이면 찢어 버리던 종이도 다시 펼쳐 볼 용기가 생겼다. 쓸 때의 감정이 떠올라 아침부터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암흑의 시인처럼 과장된 표현에 웃음이 났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글을 통해 나 자신과 소통하며 치유의 시간을 보냈다. 암울하게 끄적거리던 공책은 어느새 밝은 하루와 아이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찼다. 매일 밤, 전날 쓴 노트를 들추며 행복을 떠올렸고, 다음 장을 넘겨 또다시 사랑을 기록했다. 가슴에 켜진 등불은 점점 더욱 세차게 타올랐고, 얼굴에 환한 빛으로 드러났다.
남편은 일을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아이와 놀아주었다. 유치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고, 여러 목소리를 만들어 내며 책을 읽어주곤 했다. 며칠 전에는 저녁 먹은 그릇을 치우던 손을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까르륵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장면이 유난히 따뜻하게 다가왔다. 여태껏 남편이 퇴근한 후, 쌓인 집안일을 돕고 아이를 돌보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본인도 피곤했을 텐데, 내 눈치만 보느라 힘든 내색도 못했을 테다. 내가 갑자기 둘을 껴안자, 남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입에서 ‘고마워.’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꺼내는 밝은 한마디였다. 민망했는지 몸을 비틀어대는 남편을 더 꽉 안으며 가슴으로 전해지는 온기를 만끽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슬리퍼를 신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자랑하면서 어딘가로 바쁘게 향하는 이들과 함께 걸었다. 양손은 유모차를 붙들고, 등에는 캐릭터가 그려진 배낭을 메고 길가를 누볐다. 가끔 멋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힐끗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괜히 주눅 들지 않는다. 화려한 구두던지, 닳은 운동화던, 무엇을 신고 있던지 내 길은 나만의 걸음으로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