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소희 Sep 29. 2015

욕망도 철이 든다

어릴 적에 외할머니는 나를‘번캐’라고 불렀다. 번개보다도 더 빠르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외갓집에 가면 반가운 마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을 겨를 없이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외갓집 마루는 야트막해서 달려오는 그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신을 벗을 수가 있었다.


“쯔쯔, 번캐 같으니….”


 외할머니의 혀 차는 소리에 돌아다보면 마당에 나뒹굴어있는 신발은 내가 봐도 가관이다. 신발 하나는 저쪽에, 또 다른 신발은 이쪽에.


 노래를 좋아하셨던 외할머니는 내게 노래를 시켰다. 뜻도 모르고‘빈대떡 신사’를 부르고‘처녀 뱃사공’을 불러 재꼈다. 그 여세를 몰아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오락부장을 맡았었다. 체육 대회 때 응원단장은 물론 수학여행을 갔을 때는 쏘울 춤으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그런데 실상 나는 끼도 없고 말주변이 없으며 유머감각도 없다. 그런데도 한때는 드럼을 배운다고 설쳐대기까지 했으니 분수를 모르고 들까불었던 것이다. 그때 진작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였던 프로이트를 만났더라면 엉뚱한데 정신을 팔지는 않았을 텐데.


 프로이트는 사람의 의식의 밑바닥에는 무의식이 잠을 자고 있는데 그 무의식이 나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대륙처럼 거대한 무의식이 억압당했을 때 사람은 히스테리를 부리게 되거나 강박 증세를 보인다는 이론은 나도 나를 몰랐던 내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어쩌면 번캐 같았던 학창시절의 행적은 재능이라기보다는 내 욕망을 대신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욕구가 현실로 인해 좌절감을 느꼈을 때 보이는 병리적인 증상이랄까. 그걸 재능이라고 착각하고 방송국 주변을 기웃거렸다면 아마도 쪽박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인간만큼 스펙트럼이 넓은 동물도 없다. 며칠 굶게 되면 남의 빵에 손을 대는 것도 인간이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아깝지 않은 게 또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눈으로 포착할 수 있는 의식의 세계여서 내 의지로 조절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은 때론 자신을 알지 못할 때가 있다. 왜냐면 자기의 내면에는 낯선 사람이 또 한 사람 들어앉아있기 때문이다. 그 이상한 존재는 의식의 통제를 받기도 하지만 은폐되어 있다가도 툭 튀어나와 나를 여기저기 끌고 다닌다. 그 무의식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은 결핍과 불만족을 데리고 다닌다. 바라는 게 많으면 늘 허전하고 충만감이 없다. 과한 욕구는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실감만 경험하게 한다.


 게다가 욕망에는 깊이와 넓이가 있다. 자신의 면적보다 넘치는 욕망은 과대망상이고 소극적인 욕망은 열등의식이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막상 해보면 쉽지 않다. 이것저것 집적대지만 시들해져서 결국은 흐지부지 끝이 난다. 남들이 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건 이 욕망의 면적을 깨닫지 못해서다.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가만히 있어야 별의 위치도 보이는 법이다. 길을 찾는답시고 이리저리 우왕좌왕 하다 보면 나중엔 지쳐 죽게 된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의욕이 넘쳐난다고 설칠 것이 아니라 때론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원래‘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고 델타 신전에 적혀 있는 말이다. 그 말이 괜히 명언이겠는가. 모든 인간이 욕망으로 고통 받는 것을 신도 알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구닥다리 핸드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