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로부터 얻어지는 수고와 희생이라는 도덕적인 부채를 생각하다
이 두려움의 끝은 무엇일까. 다가오지도 않은 불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요즈음이다. 유럽 국가가 국경을 봉쇄한다는 기사를 접하고 20파운드 쌀 한 포를 더 샀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거라고 여기면서도 라면도 몇 개 더 챙겼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마저 살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올까봐 걱정이다.
우연이겠지만 40년 전에 중국 우한시 외곽의 한 생화학 무기연구소에서 인위적으로 바이러스를 만들었다는 소재를 다룬 딘 쿤추의 ‘어둠의 눈(The Eye’s of Darkness)’이 다시금 화제에 올랐다는 기사를 보았다.
소설을 읽지 않아 지금의 현재 상황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설 속에 ‘우한’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는 건 신기하다. 소설가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상상을 동반한 직관력이다. 바이러스를 다룬 소재를 담은 소설이 1981년도에 출간 됐다니 딘 쿤추의 상상은 예지력을 지닌 듯 하다.
하지만 빌 게이츠도 이미 전쟁보다 바이러스 출현이 더 위험하다고 언급했고 이미 인류는 여러 차례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전혀 바뀌질 않고 모양만 다를 뿐 마치 일제히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듯 뒤로 갈 줄 모르고 한 방향을 향해 앞으로 갈 뿐이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얼어버린 세계는 빗장을 닫아 걸기 시작했다. 바이러스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살포됐든 야생동물에 의해 인간에게 옮겨졌든 간에 사람들은 물리적 거리가 강제적으로 필요하게 됐다. 그 결과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가 될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제 공포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타고 말았다.
100세 수명을 바라보는 시대에 바이러스에 감염된 80세 이상 노인은 치료를 하지 않는다는 이탈리아 외신 기사는 씁쓸하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치료가 의미가 없다는 뜻이리라. 나이가 80이 넘었다는 이유로 병실에서 내쳐지는 비정한 사회현상에 분노가 일었지만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았던 어제의 불성실이 내 마음의 화를 막아선다.
조금만 고쳐도 멀쩡해지는 물건이 마구 버려지고 썩지 않는 쓰레기가 지면을 덮는 동안 북극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게 솔직히 실감 나질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얻어지는 수고와 희생이라는 도덕적인 부채를 안고 살면서도 그 고마움을 몰랐다. 꿀을 먹으면서도 꿀벌들에게 고마워 한 적도 없고 산소를 내뿜는 나무에게도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사망까지 이르게 하는 바이러스가 손만 잘 씻어도 전염으로부터 방지할 수 있다니 한 줌의 햇살과 뇌까지 맑게 해주는 공기와 꼭지만 틀면 쏟아지는 물이 새삼 고맙다.
생명에 필요한 것들은 전부 공짜다. 오히려 필요 없는 것들이 귀하고 비싸다. 다이아몬드는 없어도 살지만 5분만 숨을 못 쉬어도 죽는다.
맑은 물로 손을 깨끗이 씻고 따사로운 햇살로 면역력을 높여, 나이 먹었다고 무시하는 세상에서 보란 듯이 100세까지 살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