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때론 멀리 있어야 그리움이 짙어지는 법이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4월이 오고야 말았다. 온 세계를 덮어버린 두려움도 계절의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사회적 격리를 강조해도 삼시 세끼 땟거리야 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봄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마스크를 쓰고 마켓을 갔다. 계산대 앞에도 사람들이 널찍하게 서있었다. 또 다른 풍경이다. 움추린 눈빛으로 발견한 봄동 배추가 반갑다. 파릇한 봄나물도 냉큼 집었다. 이런, 냉이인줄 알고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 쑥이었다. 사람들의 접촉을 피하느라 허둥거린 탓이다.
6피트, 바이러스 전염을 벗어나는 사람과 사람과의 거리란다. 말도 안 되는 거리긴 하지만 일리가 있다. ‘개체 공간’의 개념을 세운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에 의하면 친밀감을 주는 거리는 15인치 이내라고 한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다.
추행이라고 느끼는 불쾌감은 자신의 공간에 불쑥 들어온 존재에 대한 본능적 거부반응이다. 사랑하는 연인사이라면 간격이고 자시고가 없다. 신혼 때는 밥술을 뜨다가 눈만 마주쳐도 밥상을 밀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오히려 남녀가 멀찍이 거리를 두게 됐다면 사랑이 식은 징조리라.
예로부터 남의 집 똥개가 새끼를 낳는 것까지 챙기며 정을 나누는 걸 미덕이라고 여겨왔다. 얕은 담장을 넘나들며 뜨끈한 김치부침개가 전해지고 입맛을 돌게 하는 김치겉절이가 수시로 오고 갔다. 야트막한 높이는 울타리 너머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으니 물김치 한 보시기를 후딱 건네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상이 냉소적이다. 구조부터가 사람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며칠 전 물어볼게 있어서 전화카드로 경기도 관공서에 국제전화를 걸었더니 받자마자 응대도 없이 끊어버린다. 몇 번 시도 끝에 간신히 연결이 됐는데 내 국제전화가 보이스 피싱인 줄 알고 끊었단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회, 영혼도 탈탈 털어가는 악랄한 세상살이는 전화를 거는 것도 빗장을 걸게 만들었다.
사람관계도 철문이 되어간다. 그도 그럴 것이 좋을 때는 한없이 좋다가도 한 번 틀어지면 원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친밀거리와 사적인 거리를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감정의 골은 상처도 아주 깊다.
자연은 이미 자신의 간격을 알고 있다. 나무와 볍씨는 일정한 거리를 건너뛰고 심어야 한다. 상추씨도 다닥다닥 뿌리면 피지도 못하고 죽어버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때론 멀리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 알아도 모르는 척, 봐도 못 본 척 멀리서 지켜봐야 관계가 오래간다.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에서 멀어지는 건 원래 애초부터 신뢰가 없어서 그런 거다.
복숭아꽃도 멀리서 봐야 아름답듯이 그리움은 멀리 떨어져 있어야 배양된다. 집에만 있으려니 짙은 꽃향기처럼 떠오르는 그 사람이 보고 싶고, 곁눈질로 바라보는 봄이 더욱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