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현실 속에 부화된 환상의 3D다
오늘은 과거의 진행이고 내일의 시작이라지만 사람은 입체적으로 살아가게 마련이다. 아무리 순탄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현실은 과거의 상상력이 만들어놓은 생산품이거나 미래는 현실 속에 부화된 환상의 3D아닐까?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이었다. 난 대전에 계신 이모 댁에 놀러갔었다. 놀랍게도 이모 댁에는 안방 한 가운데 TV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물자가 귀하던 1970년만 해도 텔레비전은 풍요에 대한 부러움과 다가갈 수 없는 현실의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던 기기였다. 나는 만화방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TV를 실컷 볼 생각에 들뜬 마음이 되었다.
마침 도착했던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난 이모 식구들 틈에 끼어 ‘웃으면 복이 와요.’ 라는 코미디 프로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그런데 돌연 그 코미디 대신 다른 프로를 방영한다는 것이다. 난생처음 들어 본 서양가수의 하와이 공연이라는 데 어린 마음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속으로는 다른 프로를 봤으면 했지만 채널을 돌릴 수 있는 권한은 내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뜩찮은 얼굴로 시청할 수밖엔 없었다.
영상은 경비행기가 땅으로 착륙하는 장면부터 시작했다. 헬리콥터에서 내리는 남자, 번쩍거리는 금장식이 박힌 흰색 무대 복. 허벅지가 터질듯 꼭 달라붙은 나팔바지, 목에 두른 스카프의 현란함, 살짝살짝 다리를 흔들어대는 제스츄어, 6학년짜리 꼬맹이의 동공을 단박에 사로잡았던 그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였던 것이었다.
꼬맹이는 놀라고 또 놀랐다. 흥얼거리는 목소리에 자지러질 듯 질러대는 관중들의 비명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구 저편에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에 정신이 쏙 빠졌다. 아직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아이에게는 위성중계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날 밤 뭔지 모를 흥분에 들떠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구레나룻이 시커멓게 난 서양남자가 눈앞에 어른 거려 열두 살짜리 꼬맹이는 난생처럼 잠을 설쳤다. 감히 연정이라고 말하기도 우스운 나이에 그리움이라는 풋내 나는 감정이 싹튼 것이다.
겨울방학 내내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나른한 공상에 빠지기도 했는데 미국에 가면 엘비스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그런 류의 환상이었다. 아니 망상이었다.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그 시절에 텔레비전은커녕 전화도 없던 가정형편에 미국이라니 그건 가당치도 않은 망상이었다. 그런데도 난 늘 공상 속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엘비스의 돌연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 평상시 편집광적인 나의 관심에 비춰본다면 그의 죽음은 당연히 비통으로 다가왔어야 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
난 애초부터 엘비스에게는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엘비스라는 가시적인 인물을 설정해서 그가 출연했던 영화를 보며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머릿속으로는 미국엘 가보고 싶다는 동경을 품었던 것이다. 철없던 공상은 나에게 현실의 누추함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제공했다.
어쨌든 난 지금 가수 엘비스는 죽고 없는 LA에서 살고 있다. 미국으로 가서 엘비스를 만나겠다는 개도 코웃음을 치고 갈 공상대로 결국은 마법의 양철통을 타고 만 것이다.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꿈을 스스로 허물지만 않는다면 미래에 분명히 재현되는 모양이다. 오늘도 나는 마법의 양철통을 손질한다. 미래에 다가올 어떤 날의 전부가 되기 위해.